ADVERTISEMENT

백만명이 한명 꼴의 희귀한 병|어느 고교생의 투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백만 명 중에 1∼2명 꼴의 발병률을 보이고있는 희귀한 난치병, 재생불량성 빈혈증에 걸린 어느 고등학교학생이 2년3개월 동안 병마와 싸웠으나 끝내는 수혈비가 없어 치료를 포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만을 기다리고있다. 불운의 환자는 수원시 수성고교 3년 생인 이상기군(19·경기도 수원시 숭화동 273). 삶을 버리기에는 지금까지 투병해 온 그의 순박한 생애의 의지가 너무 안쓰러워 주변의 가족과 벗들 그리고 주치의 마저 애타고있다.
15일 현재 이 군의 체중은 65㎏. 환자라기에는 아직 체구가 당당하고 용모가 너무 늠름하다. 그러나 하루하루 혈관 속의 피가 6·5g씩 말라 죽어가고 있다. 재생불량성 빈혈증이란 체내의 자체조혈을 하지 못해 핏속의 적혈구 백혈구혈소판(혈소판) 이 날마다 죽어 가는 난치병이다.
2년 동안 이병과 투병해 온 이 군은 고등학교졸업식을 오는 17일로 앞두었다. 남들은 대학에 진학을 하고 취직을 하는 등 앞날의 밝은 희망에 졸업식을 맞고 있지만 이 군은 지금 소리 없이 죽어 가는 자신의 피를 의식하며 나날을 보내고있다.
대학진학은커녕 이미 대학예비고사조차 포기하고만 자신이다. 그래도 이 군의 투병자세는 고고 생치고 놀랄 만큼 태연했다.
이 군이 이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69년4월. 처음에는 열이 나고 코가 답답해서 감기에 걸린 줄 알았다. 그해 11월 수원시내 모 병원에서 단순한 축농증진단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이듬해 2월 재수술을 했다. 그러나 증세는 여전하게 코에서 연방 피를 쏟아 작년 8월31일 연세대「세브란스」병원 채응석 박사의 진단 끝에 비로소 1백만명 중에 1, 2명 꼴로 발병한다는 재생불량성 빈혈증임을 확진하게 됐다. 확진 당시에는 상당히 중증에 빠져 이 군의 혈색소치는 4g(정상이 15g) 이었다.
학교에서의 이 군은 착실한 장학생. 연탄소매업을 하는 아버지 이근우씨(58) 에게 4남5녀의 대가족이 매달려 이 군은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장학생이 되기 위해 밤새워 열심히 공부했다. 그때마다 코피가 나오고 해서 처음엔 수술 끝이 좋지 않아 그러려니 하고 「테라마이신」을 콩 먹듯이 했다. 3학년 때는 드디어「5·16장학금」을 타게됐고 학생회장에 뽑혔다. 우수한 성적과 함께 모범학생으로 인정되어 당시 홍종철 문교부장관과 남봉진 경기도지사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재생불량성 빈혈증이 현저해진 것은 작년5월께 부터 매일 1, 2회씩 코피가 쏟아졌고 얼굴은 창백해 졌으며 몸에는 푸릇푸릇 멍든 자국처럼 반점(피하출혈) 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업 중에도 코피를 자주 흘려 담임 김진호 교사가 이 군을 데리고 채 박사를 찾은 것이다. 「세브란스」병원 내과「팀」(채응석·한지숙·김경석 박사) 의 최종진단을 받은 이 군은 작년 8월이래 1주일에 1회 혹은 2회에 걸쳐 한번에 5백㏄의 수혈을 받았다. 수혈비는 5천원. 그동안 30병(1만5천㏄)을 수혈, 가장 위험한 6개월의 고비를 넘겼다. 채 박사는 『지금 이 군의 경우는 반복수혈만 계속하면 꼭 살릴 수 있는 자신이 있다』고했다.
지금까지 이 군은 아버지가 연탄을 팔아 열흘에 한번씩 꼬깃꼬깃 접어진 5천원을 주면 그 돈으로 수혈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이 군의 집안사정으로는 더 이상 수혈할 형편이 못 된다.
이 군의 아버지 이근우씨는『고기를 사줄 돈조차 없어 수원 서호에 낚시질을 해서 붕어를 달여주고 있으나 어린것이 안쓰러워 못 보겠다』 고 한숨지었다.
그러나 재생불량성빈혈증 환자답지 않게 이 군은 너무나 자기의 병에 대해 태연했고 투쟁적이었다.
『저는 제 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의지로써 끝까지 투병해보겠습니다』 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모들이 자기에 대해 걱정할까봐 태연히 기왓장을 부수며 태권도 연습을 하고 식사도 잘한다.
주치의 채 박사는 『어린 고교생치고는 자신의 병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꼭 살겠다는 집념이 누구보다 강해 눈물겹다』 고 했다. 채박사에 의하면 이 군은 항상 밝은 표정으로 자기 카르테를 묻고 기탄 없이 병세를 털어놓곤 한다는 것.
이병은 작년이래 「세브란스」병원에서 5 케이스밖에 치료를 해보지 못한 희귀한 병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병원당국에서도 치료에 필요한 엽산(엽산)주사를 여러 차례 무료로 놓아주었지만 수혈비는 무료제공을 할 수 없다며 이 군의 수혈비 걱정으로 안타까워했다.<고정웅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