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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카메라」에 담은 「집념 16년」|마산 약방주 김일규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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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카메라」에 쏟은 일념. 인생을 시종 「카메라」에 담는다. 담아 보는 정도가 아니라 기록하고 전시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다.
경남 마산시 두월동 2가 10 마산 약방 주인 김일규씨 (52)- .김씨의 「카메라」 취미는 취미라기에 앞서 하나의 인생이었다. 본업은 약종상. 4평 크기의 약방에는 여느 약방처럼 각종 약이 즐비하게 진열돼 있다. 그러나 김씨의 약방 손 금고 옆에는 ZEISS·IKON (서독제) 「카메라」가 언제든지 놓여 있다. 손때가 묻은 소중한 고물. 싯가로 15만원, 최고급「카메라」이다.
약방 손님이 뜸하면 김씨는 마산 시내 곳곳에 전화를 건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알아보기 위해서다. 얼핏 남이 보면 할 일 없는 사람 같다.
그러나 하루중 한순간도 역사와 인생의 장면을 잡으려는 집념을 버리지 않는다. 부둣가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그는 부리나케 「카메라」를 둘러메고 자전거를 타고 현장에 달려간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벌써 16년째.
그가 잡는 「카메라」의 촛점은 마산 시내의 구석구석을 누빈다. 장터 거리의 진흙 투성이에서 세무서 창구에 이르기까지. 잡혀지는 대로 「필름」을 뽑아 사건별로 정리한다.
그리고는 부엌 옆에 1평 짜리 규모로 만들어 놓은 현상실에서 밤낮 없이 현상을 한다. 그의 정성을 담은 작품의 무료 전시회는 주로 가을에 열린다. 그것도 가두에서.
이른바 「사진 순회 가두 전」. 지난해로써 꼭 16년째의 가두 전시회를 열었다. 어느 해의 전시회는 순전히 시민의 세금 납부 상황만 가지고 전시하기도 했다. 전시 안내장의 서문에는 『국민들이 낸 세금이 잘 쓰여지고 있으며 어느 점이 잘못 되었는가를 보여드립니다』라고 씌어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사진은 현재 5만7천3백장. 모두가 생생한 기록들이다.
그 가운데는 저 유명한 3·15 마산의거 때 바닷가에 「드럼」통처럼 떠오른 김주열 군의 최루탄 박힌 시체를 비롯해 국민학교 담벼락에 박힌 무차별 총격의 탄흔 등 값진 현장들도 있다. 3·15 마산의거를 주제로 한 기록 사진만도 2백여 점을 갖고 있다.
3·15 당시 그가 생생한 사진을 잡았다는 소문을 들은 그때의 UP통신 등 외국 기자들이 모두 김씨 집으로 몰려와 『돈을 줄 테니 사진을 팔라』고 요청해 왔을 때도 그는 『역사는 팔 수 없는 것. 더구나 그 기록을 담은 사진의 원판은 팔 수 없다』고 단연 거절했다. 작년에도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아껴 모은 사진으로 3·15 12주년을 맞아 『주권의 횃불』이라는 제하로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또 하나의 걸작 전은 5·16 혁명 후 「라이프」「타임」「뉴스위크」등 외국의 잡지 표지에 실린 인물 2천3백50명을 복사, 『세계의 얼굴』이라는 제하로 사진전을 연 것이 이 같은 극성스런 일념 때문에 김씨는 조상으로부터 물러 받은 싯가 8백만원의 큰집을 팔아야했다.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약방 집이 바로 그의 집이었다.
이 집을 팔고 방 두 간을 빌어 약방 겸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것. 보증금 10만원에 8천원의 삭월세로 들고 있는 것이다.
지금 경영하고 있는 약종상은 일찌기 50년부터 시작했다. 남 같으면 그사이 떼돈을 벌었을 처지였지만 사진 전시회에 밑천을 다 들여 김씨의 경우는 해가 갈수록 오무라든 셈이었다. 요즈음은 한달 기껏 벌어 봤대야 5만원 안팎. 그 돈으로는 사진의 현상 값도 대지 못한다.
심지어 자녀들의 진학조차 거들지 못할 만큼 쪼들렸다. 7년 전 8백장의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 땐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 장남 태화씨 (현 육군 중위)가 모처럼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어도 등록금을 대지 못해 진학을 못 시켰다고 두고두고 안쓰러워하고 있다. 2남 태문군 (24)은 아예 공사를 지망했다.
그러나 김씨는 후회하지 않는다 했다.
그의 집 마루에 발 들여놓을 곳조차도 없을 정도로 빽빽이 쌓아 올려진 사진첩은 바로 그의 인생을 담은 것. 인생뿐만 아니라 역사를 길이 새긴 기록을 쌓고 있는 것이었다.

<마산=김택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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