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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제24회 발명학회(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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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성공한 발명가들>
관계자들의 끈덕진 노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조선」은 창간1년 만인 34년6월 일단 휴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가는 10전이고 「페이지」수는 창간 때 27「페이지」, 많을 때 70「페이지」인 조그마한 「과학조선」이었지만 특히 과학 조선사를 독립시켜 다음과 같은 진용을 짜고 좋은 내용을 담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었다.
◇과학 조선사 진용(경쟁략)
▲고문=현상구 서춘 김동성 이인 주요한
▲편집고문=김창제 신봉조 이은상 윤왕복 이춘호 박창렬
▲전무이사=김용관
▲이사=박길룡 선우전 김종사 김해림 강진두 현득영
뒤에 고문으로 설의식씨, 편집고문으로 문일평씨, 이사로 유광렬 정인관 김룡암 등 제씨가 추가 선임되어 「과학 조선」을 살리기에 애를 썼지만 창간1년만에 일단 휴간의 슬픔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과학시대라는 지금에도 우리 나라에 과학 잡지하나 없는 설정임을 생각할 때 그 당시 과학잡지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가는 굳이 해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년이라는 짧은 기간이나마 제1차「과학조선」이 한 일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과학이야말로 문명발전의 원동력임을 우리 민족에게 깨우치는 계몽기사뿐 아니라 우리 손으로 과학을 진흥시키는 이 화학 연구소의 설립을 외치는 등 우리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글이 매호에 실렸다.
그 당시 현재 미국「유타」대학 교수로 있는 이태규 박사가 이학박사로 일본 경도 제국 대학서 혁혁한 연구업적을 올리고 있었다. 더우기 이 박사는 4∼5건의 특허도 가지고 있었다.
현상윤씨(당시 중앙 고보 교장)와 서신 연락이 되어 귀국을 간절히 소망하지만 자기가 하고있는 연구를 계속하려면 45만원이 있어야 된다는 바람에 불러오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도 기억이 난다.
김용관 전무이사 등이 10만원만 있으면 우리의 이 화학 연구소 하나는 가질 수 있다고 부르짖었고 제동의 대지51·4평, 건평18·5평 짜리 기와집이 3천8백85원에 거래되던 시절의 45만원의 연구비였으니 얼마나 「스케일」이 큰 연구였는가 짐작이 갈 일이다.
제1차「과학조선」이 발간되던 시기엔 반드시 발명 학회의 힘 때문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발명으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점차 늘어났고 또한 당연히 발명으로 재미를 보는 사람도 늘어났다.
특히 손창식씨 같은 사람은 25년부터 34년까지 무려 37종을 발명했고 그중 11종에 대해서 일본의 특허 국에 특허 및 실용신안으로 등록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자유당 때 보사부 장관을 지낸 손창환씨의 형이기도 한 손씨는 32년3월 관립 동경 고등공예학교 정밀기계과를 졸업하기 7년 전인 10대 말부터 발명에 재간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년 「에디슨」이라고까지 불리었다. 척도기·활동화적완구·문지기·자동차 난방기·회중자력전 등·의류괘 등 37종의 발명으로 손씨는 동경부지사, 제국 발명 협회 등에서 표창을 받는 등 우리 민족의 발명실력을 일본에 널리 떨쳤던 것이다.
그는 뒤에 「홍콩」으로 가서 큰 부자로 행세했고 전남 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기부했다고 전해진다.
최초의 실용성 있는 한글타자기 발명으로 이름을 날린 송기주씨도 빼놓을 수 없는 당시의 우리 발명가다. 연전을 졸업하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주립대학을 졸업한 송씨는 멀리 고국을 떠난 그곳서 한글타자기 연구에 7년 동안 각고한 끝에 33년 말 「언더우드」사에서 대량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보다 20여 년 전에 이원익씨란 분이 최초의 한글타자기를 발명했으나 85개 건반이어서 쓰기가 불편했고 글씨도 깨끗하지 못했다. 송씨의 것은 한글 24자 등 42개의 문자 건반과 2개의 이동 건반으로 영문 「타이프라이터」와 다름없이 쉽게 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깨끗한 글씨로 찍혔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호창환씨의 가마니 제조기가 각광을 받았다. 새끼를 연속적으로 꼬아 가지고 하루 백장을 짜는 기계였다.
그밖에도 많은 좋은 발명이 나온 가운데 서울서 철공업소를 경영하던 이광숙씨가 발명한 새 정미기와 개성 박물관 기사이면서 발명가인 한수경씨의 고려자기 연구가 기억에 새롭다. 이씨의 새 정미기는 종래의 「롤러」를 개량한 것으로서 종래의 어떤 정미기보다 쌀이 덜 부서질 뿐 아니라 시간과 마력도 곱절이나 절약이 된다고 해서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한씨는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서기 일을 보면서 10년간 고려자기 연구에 몰두, 현대 화학 약품을 쓰지 않고 천혜의 원료와 토석을 배합해서 고려자기의 특색인 비색과 광택을 완전히 재현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씨는 사계의 대가라는 일본의 천천백교씨와 경성 제대 교수 안배능성씨(뒤에 문부 대신, 학습원 대학 장)등의 절찬을 받았다.
현재 한국일보사의 과학부장인 심승택씨가 16세 소년으로 최초의 실용신안을 등록한 것도 34년 초였다. 「심 소년의 발명」이라 해서 어떤 신문 사설에서까지 칭양된 바 있다. 심씨는 얼마 뒤 일본으로 가서 해방 전에 약30건에 달하는 발명을 한바있고 해방 뒤에도 줄곧 발명에서 눈을 떼지 않은 결과 70건인지 80건인지 본인도 모를 정도라 할 정도로 많은 발명을 했다. 그리고 당시의 발명학회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는 많은 문헌을 보관하고 있어 필자가 크게 도움을 받고 있다.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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