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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적의 춘계 공세(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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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영군 연대의 혈전>(2)
1951년4월25일 새벽에 8군사령관 「제임즈·A·밴플라트」장군은 5만의 중공 대군 공격을 받고 고전하고 있는 영국군 제29여단에 후퇴를 명령하였다. 다른 지역의 전선이 견고하게 수비되고 후방에는 지원부대가 있는데도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본 영국군에 현진지 사수를 강요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 후퇴명령에 따라 「퓨질리어」와 「얼스터」연대 장병 가운데서 보행 가능한 자들은 질서 정연히 후퇴했다.

<군모에 표식2개 달 특권>
2백여 명의 부상자들은 「탱크」위에 실려 빠져 나왔다. 포탑과 포신에는 피가 흥건히 젖은 부상병들이 매달려 나왔다. 이렇게 해서 영국군 제29여단 병력의 3분의2는 중공군 포위망을 돌파했다고 그러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고지에서 우군 본대보다 7리 뒤에 떨어져 적대 군에 갇힌 「글로세스터셔」 연대 제1대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일」강 문제로 영·불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글로세스터셔」연대는 2열 횡대로 불군한테 접근했다. 그 중 1대가 무릎을 꿇고 사격하고 난 후 다시 만약을 재노라면 다른 1대는 그사이에 총검으로 적군을 막았다. 장교들은 이렇게 소리쳤다. 『후열, 뒤로 돌아! 사격.』
「글로세스터셔」연대 원들은 등을 서로 맞대고 사격을 계속하면서 불 군이 후퇴할 때까지 버티었다. 이 때부터 영국 군대에서 「글로세스터셔」연대만이 군모에 두 개의 표지를 달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하나는 앞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뒤에. 그로부터 1백50년 후에 「글로세스터셔」연대는 한국의 임진강고지에서 다시 등과 등을 맞대고 싸웠다. 이들 병사들은 이미 「웰링턴」군단의 감정 없는 자동기계는 아니었다. 대부분은 한국전쟁이 난 후 소집된 30세 이상의 예비병들이었고 고국에는 처자들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4월25일 아침 3백명의 「글로세스터셔」대원들이 달라붙은 고지에는 대대 나팔수가 부는 기상나팔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중공군의 피릿소리가 잠시 멎었다.
중공군이 멈칫 놀라서 귀를 기울였을 때 나팔수는 기상나팔, 아침 점호 나팔, 식사 나팔을 차례차례 불었다. 나팔소리가 멎자 고요를 뚫고 사격소리가 다시금 일어나기 전에 「글로세스터셔」연대 병사들은 갈채를 보냈다. 25일 상오 6시5분에 여단 사령부에서 고지에서 후퇴해도 좋다는 부전 명령이 왔다. 「카네」중령은 포위 당해서 탈출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공중지원을 요청했다. 미군 기는 곧 날아왔다.
고지에 급강하해온 폭격기들은 「카네」중령 대원들이 파고 들어가 있는 호로부터 불과 35「야드」밖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대대장은 부상병과 남고>
「글로세스터셔」대원들은 연막 수류탄을 던져 우군기에 포격을 가리켜 주었다. 그것은 정말 아슬아슬하고도 결사적인 작업이었지만 아뭏든 중공군의 전진을 막을 수 있었다. 상오 7시55분에 「카네」중령은 거의 60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대대 통신기의 전지가 다 닳았다고 여단 본부에 보고하고, 계속 공군과 포병의 근접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나서 중대장더러 근무를 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지휘소 가까이 모이라고 했다. 지휘소 부근의 지형이 움푹 들어간 엄폐지에는 50∼60명의 부상병들이 들 것 위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카네」중령은 중대장들에게 대대의 운명을 말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항복하든지, 아니면 소수 조로 분산해서 탈출하든지 두 가지 길밖에는 없었다.
ABCD의 4개 중대장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적진을 뚫고 나가보겠다고 말하였다.
부상병들을 운반할 가망은 전혀 없었다. 부상병들과 함께 남기를 자원한 사람은 대대장 「카네」중령과 군의 군목 그리고 연대 본부의 「홉스」준위였다. 「카네」중령과 「홉스」준위는 자기들의 청춘을 고스란히 「글로세스터셔」연대에서 보냈던 만큼 사랑하는 부대 부상병들을 적진에 버려 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군의와 군목은 직무상 의당 남기로 결심했다.
ABC 3개 중대의 잔존 병력은 적의 사격이 뜸해진 틈을 타서 고지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카네」중령과 제4기 인솔자인 D중대의 「미켄·하비」대위는 굶주리고 지쳐 비틀거리지만 긍지를 잃지 않는 이들 전사들의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비」대위는 출발준비를 마친 약1백 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계곡에서 중공군에 포위>
마지막으로 이들이 고지를 내려가려고 하자 「카네」중령은 『담배꽁초를 여분으로 가지고 있으면 좀 놓고 가게』라고 조용히 말하였다. 「하비」대위는 남방에 위치한 아군 전선으로 후퇴한 다른 3개조의 뒤를 따르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가 선택한 후퇴 「코스」는 뜻밖에 도적이 있는 북방으로 1「마일」쯤 북상하다가 서쪽으로 휘어져 미군부대가 지키고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자는 것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신신 당부를 했다. 『행군은 구보 부상자가 생겨도 간호하기 위해서 처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D중대가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수「마일」의 항거에서 중공군은 그림자도 안 비쳤다는 점이었다.
중공군이 으례 능선을 타고 이동하는 것을 아는 「하비」대위는 계곡으로 조심스럽게 대원을 이끌고 갔다. D중대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을 때 처음으로 중공군 수색대와 마주쳐 이들을 사살하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 같은 바위 틈성이로 뚫린 길을 더러는 넘어지기도 하면서 지친 「글로세스터셔」대열은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윽고 그들은 목이 좀 넒은 계곡을 끼고 1「마일」쯤 내려갔을 때 갑자기 양쪽 벼랑 위에 개미떼 같은 중공군이 나타났다. 자동화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적탄이 대열 좌우에 콩 볶듯이 튀었다.
몇 명의 대원이 쓰러졌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계곡을 따라 뻗어나간 도랑으로 뛰어 들었다. 맹렬한 적 사격을 받으며 부상자를 간호할 겨를도 없이 그들은 도랑 밑을 손과 무릎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기었다. 깊이가 불과 1「피트」밖에 안 되는 도랑에는 그나마 바위가 잔뜩 깔려 있었다. 도랑의 없는데도 있었다.
새로운 엄페물을 찾아야 했던 몇 명의 대원이 또 쓰러졌다. 미군 기가 날아 왔다가 그들이 아군인 것을 확인하고 벼랑 위에 기총 소사를 가했는데도 중공군의 화력은 여전히 치열했다. 여하간 영국군은 결사적으로 기어 나갔다. 드디어 「하비」대위는 부군 「탱크」부대가 5백 「야드」저쪽 전방에서 계곡을 가로막고 사격하는 게 보이는 곳까지 갔다.
중공군 사격은 여전히 치열했지만 「글로셔스터셔」대원들은 이제는 용기 백배하여 미군 「탱크」쪽으로 기어나갔다. 미군 「탱크」는 이때 중공군의 사격을 받고 있었으며 지휘관은 북쪽에서 우군이 나타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글로세스터셔」대원들이 뛰어나가자 미군 중위는 발포를 명령하였다. 이 바람에 또 영국 군 몇 명이 쓰러졌다. 후퇴하고 있는 것이 영국군이라는 것을 알고 공군지원을 지시하고 있던 미군기 한대가 「탱크」 위에 가까이 내려가면서 날개를 흔들어 보였다고 미군 중위는 비행기 신호를 이상스럽게 여기면서도 「탱크」에 접근하려는 이들 남루한 복장의 집단에 사격을 계속하라고 명령하였다.
숨이 차서 땅에 엎드린 「하비」대위는 막대기를 하나 주워 거기에다 목도리를 매고 군 모를 벗어 앉고서는 앞으로 기어나가면서 기처럼 흔들어댔다. 그러나 이편이 누군가를 알아차린 것 같지 않았다. 다시 머리를 짠 미군 기는 이번에는 더 낮게 내려와서 통신 통을 떨어뜨렸다. 그제 서야 영국군을 겨누던 미「탱크」의 사격은 멎었다. 「글로세스터셔」 때에서 살아남은 대원들은 대열을 가다듬고 미군「탱크」위에 대피했다.
그리고는 적이 우글거리는 능선에 응시하면서 함께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군「탱크」대원들은 영국군을 적으로 과인한데 심한 충격을 받았다.
한 미군「탱크」대원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온통 피투성이가 된 맨발로 다가온 영국군에 자기구두를 벗어 주었다. 미군 장교는 「하비」대위에게 여러 차례 되물었다.
『우리 중에 쓰러진 대원이 얼마나 되오.』 그러나 이 물음에 대답하는 영국군은 아무도 없었다. 미·영 군이 손을 잡은 후부터는 미군「탱크」중위도 적만에 맞았지만 끝까지 영 군의 후퇴를 엄호해 주었다. 미군 전선에 수용된 「하비」중대원은 모두 38명 뿐 이었다. 그리고 이 중대만이 그래도 대오를 갖추고 적중돌파에 성공했다.

<8백89명 중 84명만 생환>
「글로세스터셔」연대의 전체 피해는 8백89명 중 84명만이 후퇴했고, 나머지 8백5명은 전사하거나 부상하거나 혹은 포로가 되었다. 영국 군 제29여단의 다른 연대들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지만 「글로세스터셔」연대의 희생이 가장 많았고, 이 연대 중에서도 제1대대는 거의 옥쇄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영국군의 이러한 용전과 희생으로 서울을 향한 중공군의 인해는 저지되었다.
4월23일부터 30일까지 임진강 전선에서 적어도 1만5천명의 중공군이 죽었다. 한편 「유엔」한국 참전국 협회(회장 김일환·사무총장 지갑종)에서는 작년 4월24일에 「글로세스터셔」연대 용전 20주를 맞아 그 연대 제1대대가 최후까지 버티던 바로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고지에 전적비를 세우고 이들의 전공을 길이 기념하게 하였다.
◆주요일지(1951년5월23·24·25일)
※5월23일 ▲적, 전 전선에서 총 퇴각 ▲「유엔」군, 춘천 재탈환 ▲합동 수사본부 7개월만에 해체 ▲「뉴요크·타임스」, 소련이 한국 휴전 제의를 고려중이라고 보도
※5월24일 ▲「유엔」군, 총 반격 개시 ▲미군, 춘천 탈환 ▲「밴플리트」 8군 사령관, 적 2차 공세 실패 언명 ▲이 대통령, 「유엔」군 증파 희망
※5월25일 ▲아군, 인제서 진격 ▲이기붕 국방, 국민 방위군 해산에 담화 ▲3인 「유엔」조정위회 서전대표, 한국전의 평화적 해결 교섭에 응할 용의 있다는 소련「메시지」를 접수했다고 언명
◆정정=1월4일자 2판 및 3판의 본 연제(272회)의 부제목 「적의 춘계 공세」번호②는 ①의 잘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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