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찬 농한기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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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차가운 허리춤을 추스르며 묻어둔 보리씨들이 연한 초록빛 고개를 들다 말고 영하의 추위에 얼어붙었다. 북서풍만 연일 불어주는 넓은 들판에서 일들을 끝내버린 뒤의 안도와 한가해서 일어나는 숱한 상념들이 오히려 두렵다. 햇빛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에 정신을 쏟을 때 인내하는 긍지와 결심의 보람이 있긴 했어도 우선 편하고 싶은 욕심 하나로 이런 날들이 몹시도 기다려졌건만. 어머니를 도와 막상 김장과 메주를 다 쑤고 난 지금 마음은 오히려 텅 비어 가는 것만 같으니 웬일인지 모르겠다. 차곡차곡 혼자만이 해야할 수예라든가 진행되지 않는다.
아직도 이웃에는 여름내 담과 고통으로 얻은 대가를 겨우내 헛되게 소비해 버리는 이들을 구경하기가 어렵지 않다. 그런 사람들을 목격할 때마다 서글픔을 금할 수 없고 그 집 부인 네의 굵게 마디진 손가락을 펴 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몸이 없어 식사시간마저 일정치 못하다는 도회의 숱한 삼들을 그려보며 게으르고 방심하기에 험한 식사와 허술한 집들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슬픈 이치…. 이웃 나라의 부강함을 입으로만 부러워 말고 먼저 그들의 근면성을 부러워하며 우리의 태만을 자각해야 한 것 같다.
계절이 가져다주는 스잔한 감상들을 밀치고 보다 알뜰한 나를 위해 뭔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움직이자고 가슴 깊은 곳을 채찍 해 보는 것이다.
권숙희<경북 영덕군 병곡면 송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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