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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의 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5월의 장미원 같다. 세막경기를 바라보는 어느 제과점의 풍경이다. 물론 찬바람이 부는 서민의 눈엔 그림의 떡이다. 『케이크가 다 뭐람!』하는 심사일 것이다.
「차트」를 펼치지 않아도, 요즘의 경기위축은 누구나 하는 이야기다. 제과점에 줄을 잇던 어제의 풍경은 쉽사리 예상할 수 없다. 화려한 점두는 공연한 눈요기일 뿐, 아직은 한산하다.
「크리스머스·타이드」(12월24일∼신정)에「케이크」상자를들고 우왕좌왕 하는것은 무슨 특별한 중내가 있는 풍습은 아니다. 다만 상인들의 상혼에서 비롯된 것이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을 펼쳐보아도「크리스머스·케이크」라는 항목은 찾을 수 없다. 한 외국인 신부의 말을 들으면 『미국의 백화점취미』인 것 같다. 「유럽」의 황실에서 만들어내는「케이크」는 그 호학로움을 이루 말할수 없다.그러나「유럽」이 황실의「케이크」사까지 음미할 여유는 없다.

<조그만 유대서 인간미교류>
「유럽」의 주다들은 연중 이 무렵이면 가정의「오븐」에서 과자를 구워낸다.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미국의 생활습관은 이들과는 좀 비교가 되는 모양이다. 산견화사회에선 사고방식도 그에 따라가지않을수 없는가 보다. 집에서 굽는 과자보다는 화려한 포장지에 싼 동양의 과자를 선택하려 한다. 말하자면 그것도「머리트크러시」(실소주의)의 생활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경우가 인문적인 분위기를 갖는가는 더 말할필요도 없다.
사실 현대의 시민은 누구나 생활의 요령화·능률화를 말하고 있다.그러나 이것은 엄연히 하나의 근계를 갖고 있는것이 아닐까. 가령「요령」과「능율」이라는 생활「모트」는 탈「인간조건」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다못해 연탄「오븐」일 망정 그것에서 따뜻하고 향기로운 과자를 구워내는 생활이 비요령이고 비능율이라고 핀잔을 받을 일은 못된다. 인간의 상호정감이란 하찮은 유대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터무니없는 허구에 저마다 감히, 스스로를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말라>
새삼 이사회의 허황한 세속에 현깃증읕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하의 거리를 낭랑하게 울려주는 저 구세거의 기스리가 얼마나 쓸쓸한가? 이 사태의 어느 일각에서 살고 있는 이웃들의 부규은 왜 우리의 심정를 흔들어 주지 않는가? 하필이면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하는 걸비에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보다는 먼 세속에 왜 마음을 쓰는것일까?
바로그「베시아」는「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거륵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색주를 돼지들에게 던지지 말라』고.
돼지는 무치와 불결을 생각하게 하는 짐승이다.
그 무다와 욕의 적물이 차지하고 있는「크리스머스」는 마음이 착한 인간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
근년에 우리는 일찌기 볼 수 없었던 풍성한 분위기의 사고를 경험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생활을 어이없는 가식으로 채워주었으며,「없는 자」에겐 충구이며, 부규감의 욱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생활의 질서는 오히려 흩어지고, 모든 가계는 날로 새로운 항목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치 연이은 물질로 표현하는 것이고 사회의 미연은 돈으로 협상되는, 실로 개인의사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명예은 따라서 그 호욕의 행위이며, 「크리스머스」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기 보다는, 또 하나의 욕심을 만들어내는 날로 전과하고 말았다.

<양식과 경건으로 성탄맞이>
『「가이사」의 것은「가이사」 에게…』라는 말이 있다. 신약맥맹에 나오는「예수」의 말이다. 「크리스머스」는 「크리스머스」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크리스머스」는 이 세상에 사람의 빛을 내리러 은 「메시아」이다.
영국의 「아널드·트인비」는 오늘의 인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사랑」과 「구조」와「창조」라고 충고한 바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단(성적혹이」은 물론 아니다. 「토인비」는 오로지「탄생」만이「사랑」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크리스머스·다이드」의 경건한 의미는 사람에게 그 「사랑」과 「기지」와 「박조」를 깨우쳐주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다. 「메시아」는 반드시 무슨 명칭을 가진 「강요의 신」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답게 양식과 이성은 같고 살 수 있는 내면의 율법이다.
우리는 오늘 세가의 술렁거리는「리듬」속에서 새삼 우리 자신의 전면목을 보여주고마는 조용하고 인간미 넘친 시문을 찾는데 그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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