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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 트렌드] 무조건 착한 주인공과 로맨스 … 판타지가 된 요즘 사극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MBC 사극 ‘기황후’가 역사 왜곡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에서 선전하고 있다. 하지원이라는 믿음직한 배우를 기용해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한 덕이다. 그러나 순정파 여전사로 그려지는 기황후를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온다. 드라마 시작 전에 “실제 역사와 다름을 밝혀 드립니다”는 자막이 나오는 데도 불구하고.

고려 입장에서 좋은 인물이 아니었던 기황후를 주인공으로 한 게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한국 사극의 주인공을 늘 정의롭고 순정파에다 민족주의적 인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사실과는 영 다르게 판타지 수준으로 성격을 개조하는 데 있다.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처럼 부정적인 면이 있음에도 흥미롭고 어두운 매력의 인물을 중립적으로 묘사해 권력과 인간의 속성을 냉정하게 고찰하는 사극을 만들 수는 없는가. 역사 속 기황후는 선악을 떠나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험난한 시대에 살아남고자 투쟁해 승리한 인간이었다. 피지배국에서 태어난 탓에 물건처럼 진상되는 공녀(貢女)로 뽑혀 낯선 원나라로 끌려갔다. 다행히 차를 따르는 궁녀 일을 하다 황제인 순제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게 됐다. 『원사(元史)』에 나오듯 “살구 같은 얼굴, 복숭아 같은 뺨, 버들 같은 허리”를 지닌 데다 무엇보다 “영특해서”였다. 그러나 생존의 길은 험난했다. 질투에 불탄 황후 다나슈리(타나실리)에게 매를 맞고 인두 지짐을 당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다나슈리가 친인척의 역모사건으로 몰락하면서 기씨는 1340년께 일단 제2황후 자리에 올랐다.

기황후는 정치를 알고 권력을 가져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원사』 등에 나오는 기황후의 행적을 보면 그것을 위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시간 날 때마다 역사서를 보며 공부했고, 대기근 때 굶주린 백성들에게 죽을 만들어 나눠 주는 등 민심을 얻기 위한 정책도 주도했다. 새로운 제1황후는 조용한 성격이었고, 기황후의 아들이 황태자가 됐으므로 기황후가 실질적인 제1황후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했고 그와 함께 원에는 ‘고려양(高麗樣)’이라 불린 고려 의상과 음식 등이 유행했다.

한편 기황후가 일으킨 문제도 적잖았다. 오빠인 기철 등이 누이와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에서 전횡을 일삼다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던 공민왕(1330~1374)에게 제거당한 건 유명한 사실이다. 그러자 기황후는 고려에 군사를 보내 공격했다. 결국 망신만 당했지만 말이다. 또 황태자를 앞세워 남편인 순제와 권력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1365년 제1황후가 세상을 뜨자 마침내 공식 제1황후가 됐으나 내란과 명나라의 발흥으로 원이 1368년 멸망하면서 그 영화는 순식간에 끝났다.

기황후는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권력에 집착하게 됐을 것이다. 또 자신을 공녀로 보낸 고려에 별 애착이나 의무감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황후의 입장이며,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한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악녀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함께 보여 줘 역사의 격랑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면 어떨까?

그러나 난데없이 기황후와 고려 왕(주진모)의 로맨스가 나오는 드라마 ‘기황후’에서 이런 것을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그나마 그 고려 왕은 당초 역사적으로 유명한 패륜아 충혜왕으로 설정됐다가 거센 비난 속에서 가상의 왕으로 바뀌었다. 차라리 주인공 기황후까지 가상의 여인으로 바꾸는 게 나았을 것이다.

‘기황후’만이 아니다. 최근 여러 사극이 주인공을 절대선으로 만들고 로맨스를 남발하고 있다. 물론 역사 기록에는 빈틈이 많고 기록자가 편향된 경우도 적잖아 사극에는 작가의 시각과 상상력이 들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착한 주인공 콤플렉스에 걸린 요즘 사극은 역사의 정쟁을 단순한 선악 구도의 판타지로 만들고, 사극을 통해 현실을 읽게 할 여지가 없게 한다. 어찌 된 게 요즘 한국 사극은 냉혹한 권력 투쟁을 다룬 미국 판타지 드라마 ‘왕좌의 게임’ 시리즈보다 훨씬 더 판타지 같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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