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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지식 검투사' 손택의 외침, 세상은 왜 폭력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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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다시 태어나다
수전 손택 지음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이후
412쪽, 2만원

평론이란 ‘그 무엇’ 자체가 아니라 ‘그 무엇에 대한 글’이기 때문에 영원히 창조적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수전 손택의 글을 읽으면 이런 편견은 산산조각 날 것이다.

 손택은 지식을 무기 삼아 예술작품을 해부하지 않는다. 그는 예술에 대한 사랑과 이해, 그 자체가 예술이 되는 경지를 추구한다. 손택에게 지식은 예술을 사후적으로 재단하기 위한 부검의 도구가 아니었다. 지식은 예술을 더욱 향기롭게, 더욱 생생하게 살아 꿈틀거리게 만드는 영혼의 활력소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은 지식 자체의 죽음이 아니라 비평의 커튼 뒤에 숨어 우아하게 예술을 해부하기만 하는 나태한 지식의 죽음을 선고한 것이다. 그는 예술과 함께 춤추는 지식, 고통받는 이들과 투쟁하는 지식, 점점 타인의 아픔에 둔감해지는 현대인의 영혼의 불감증을 치유하는 지식을 꿈꾸었다.

‘미국 지성계의 대표’로 꼽히는 수전 손택은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의 글쓰기,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빚어내고자 했다. 그는 평생 100여 권이 넘는 일기를 썼다. 그에게 일기란 자아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사진 게티이미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손택은 질병 자체보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투쟁한다. 결핵으로 아버지를, 폐암으로 어머니를 잃고, 에이즈로 친구들까지 잃은 그는, 자신 또한 유방암과 자궁암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질병과 싸우기도 바쁜 환자가 ‘질병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자존감을 잃고, 치유의 희망조차 잃는 기막힌 상황을 목격하며 그 결정적 원인을 찾아낸다.

 질병을 곧 ‘환자의 죄악’으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은유들, 예컨대 에이즈를 ‘도덕적 타락에 대한 천벌’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은유는 죽음에 대한 대중의 공포와 연합하여 어처구니없는 종말론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에이즈는 ‘인류의 적’이기 때문에 그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무찔러야 한다는 은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질병과 싸우면서 동시에 악의적인 질병의 은유로 환자를 또 한 번 징벌하는 사회적 편견과 싸운다.

 “유대인이 국민들 사이에 인종적 폐결핵을 낳는다”라는 히틀러의 연설, “에이즈는 신이 자신의 법도대로 살지 않은 사회에 가한 심판이다”라는 폴웰의 설교는 질병을 은유로 사용하며 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병에 걸리자마자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고 스스로를 단죄하는 환자의 무의식에 깔린 은유는 바로 ‘모든 질병은 신의 형벌이다’라는 불합리한 은유가 아닐까.

 손택은 정의의 이름으로 활개를 치는 화려한 정치적 수사 속에 숨은 은유의 파시즘과 투쟁하며, 그 모든 차별과 폭력에도 불구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강해지고 깊어지는 무언가, 즉 ‘생명’의 아름다움을 되찾고자 한다.

 『타인의 고통』에서 손택은 매스미디어가 전시하는 천편일률적인 고통의 이미지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무딘 감수성을 공격한다. ‘전쟁’ 하면 블록버스터 영화의 전투 장면을 떠올리고 ‘기아’하면 에티오피아의 배고픈 아이들을 떠올리는 현대인은 자기의 고통은 ‘육체’로 직접 느끼면서 타인의 고통은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느낀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의 기술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영화를 보면서는 눈물을 아끼지 않으면서 정작 살아있는 옆 사람의 고통에는 무감각해져 간다.

수전 손택

 손택은 우리가 멈춰야 할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sympathy)이며 되찾아야 할 것은 타인을 향한 공감(empathy)임을 일깨운다. 연민은 아픈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안방TV로 시청하며 ARS(자동응답시스템)로 3000원을 기부하는 아늑한 자기만족으로 끝난다. 그러나 공감은 당신이 지금 고통받고 있는 그 자리로 달려갈 수 있는 용기의 시작이며, 타인의 고통을 걱정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삶을 바꾸는 적극적인 힘으로 단련시키는 삶의 기술이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 하는 삶의 태도다.

 『다시 태어나다』는 손택이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문화의 퍼스트레이디’로 불리기 이전, 15세에 버클리대에 입학하고 17세에 결혼하며 25세에 하버드대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해석에 반대한다』를 통해 문화계의 중심에 우뚝 서기까지의 고뇌와 방황을 고스란히 담은 일기다.

 나는 비평가로서의 손택, 소설가로서의 손택도 물론 좋아하지만, 사라예보 내전 당시 죽음의 공포에 맞서며 겁에 질린 사라예보 사람들에게 ‘고도를 기다리며’를 상연하던 연극연출가 손택을 더욱 아낀다. 그는 전쟁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로 나날이 시들어가는 사라예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구호물자가 아니라 ‘전쟁의 와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술을 창조하고 감상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믿음임을 일깨웠다.

 손택은 내게 아무리 험악한 상황에서도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자유를,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글쓰기를 통해 ‘우선 나 자신이 되는 법’을 가르쳐준 따스한 멘토다. 나는 『타인의 고통』이나 『은유로서의 질병』을 통해 동서고금의 모든 적들과 거침없이 혈투를 벌이는 ‘지식의 검투사’ 손택을 동경했다.

 이제 『다시 태어나다』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눈은 존경에서 사랑으로 바뀌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우리와 똑같이 고독을 두려워하고 사랑을 갈구하며 치열한 삶을 꿈꾼 아름다운 소녀 수전 손택을 만난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수전 손택(Susan Sontag·1933~2004)
미국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소설가·극작가·연극연출가·영화감독. 1966년 소설평론집 『해석에 반대한다』를 발표하며 주목을 받았다. 대표 저서 『사진에 관하여』(1977·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 소설 『인 아메리카』(1999·전미도서상 소설부문 수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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