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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거창사건(3)|「건벽청야」사건(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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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거창사건에 직접 관련된 당시의 11사단9연대의 관계자증언은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즉 연대장 오익경 대령과 3대대장 한동석 소령, 그리고 집단총살을 직접지휘한 3대대정보장교 이종대 소위는 원래 미수복 지역이었던 신원면에서 주민과 합세한 공비들 기습으로 경찰과 청년 방위대 1개중대가 전멸했기 때문에 국군이 재 진주하여 공비분자를 처단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11사단의 한 지휘관은 사건발생원인에 대해 앞서의 9연대 관계자들 주장과는 좀 다른 증언을 하고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집단총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그때의 「청야」작전수행 「방법」이 너무도 잔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오익경 한동석 이종대의 세 증인은 그 동안 굳게 입을 다물어오다가 20년만에 처음으로 자기들이 직접 관련된 이 사건진상을 털어놓고 있다.

<양민학살 나중에 알아>
오익경씨(당시 11사단9연대장=대령·현 사업·47)<나는 김희준 대령 후임으로 9연대장에 부임했는데 이때 형편은 공비들이 작전지역내의 면소재지를 대부분 지배하고 있었어요.
공비토벌인 관계로 연대산하의 3개 대대를 각각 지역적으로 나누어 움직이고 있었어요. 함양에 제1대대가 있었고 제3대대는 거창을 맡는 식이지요. 그때 거창에, 특히 신원면에 공비가 약3백명 있다는 정보가 들어 왔어요. 그래서 3대대로 하여금 신원면을 수복하고 산청으로 나와 타 대대와 합류, 지리산 남부를 소탕키로 작명을 내렸어요.
그런데 신원면에 진주한 3대대장은 「적정이 없다」고 진주의 연대본부에 보고해왔어요. 그리고 경찰과 청년방위대로 면의 지서를 수복시켰다고 했어요. 그러나 3대대가 산청으로 나온 후 공비와 통비 주민들에 의해 남겨 논 경찰과 방위대원이 전멸했어요. 나는 이 보고를 받고 한동석 대대장을 몹시 질책하고 다시 신원면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습니다. 3대대가 들어가서 얼마 안 있다가 1백87명의 빨갱이를 처단했다는 전과보고를 받았어요. 단순한 전과보고여서 이 문제가 후일 소위 「거창양민학살」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줄은 전혀 생각지 않았지요.
며칠 후에 김종원 대령과 국방부조사관의 현장조사를 통해 진짜공비만이 아닌 부락민 5백여 명이 총살당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또 김 대령으로부터 국회에서 크게 정치문제화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구요. 나는 사건현장에는 안 가보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문제가 된 다음에는 마땅히 갔다왔어야 할테지만요.>
▲한동석씨(당시 11사단9연대3대대장=소령·현 공무원·44)<신원면에 다시 들어간 3대대는 야간전투 후 2월11일 낮에 추격전을 전개하여 많은 공비와 입산한 주민을 생포했어요. 분류된 4백50여명의 주민은 학교에 수용하고 현지사정에 밝은 사찰계 형사 3명과 대대정보장교로 하여금 심사케 했어요.
이중 군경공무원가족과 노인·유아를 제외하고 직접 무기를 갖고 아군에 대항한자와 적에 정보나 식량을 준자, 그리고 과거부터 사상이 불온한자를 1백87명 골라냈습니다. 중간 보고에 의하면 이들 중에는 성묘를 하고 오는 길이라고 상복을 입고 있는 자도 있었는데 조사해보니 옷 속에서 개머리판 없는 「카빈」총이 나왔어요. 이자의 심문을 통해 산골짜기에 묻어둔 무기와 탄약도 찾아냈고, 집방 고래 밑에 만든 「아지트」도 발견했어요. 이때 비로소 이 부락전체 방고래 속이 공비들의 「아지트」로 진지화하여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당시 나는 적이 계속 출몰하는 상황하에 있어 대대를 이끌고 적과 교전하다가 본부에 돌아와 보니, 이들 1백87명을 작명에 따라 대대정보장교 이종대 소위가 처단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이 보고를 받고 같은 민족끼리 생명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빼앗아야했던 민족의 비극을 한없이 슬퍼했습니다.>
▲이종대씨(당시 11사단9연대3대대정보장교=소위·현 상업·43)<거창사건의 총살집행의 직접지휘를 내가했습니다. 물론 상사의 명령에 의해서죠. 거창군 신원면의 중유리·대현리·와룡리 등의 마을주민들을 그곳 초등 학교에 모두 모이게 했어요. 거창경찰서 사찰주임 유봉순 경위(?·전 국회의원)가 보낸 3명의 형사가 통비 분자들을 가려냈어요. 면장 박영보씨(4·19후 유족들에 의해 피살)도 분리작업을 거들었구요. 군경 등 가족으로 분리된 이의의 주민들은 산골짜기로 끌고 가서 사병들을 시켜 기관총으로 총살했습니다.
사살 후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지른 것도 사실입니다. 또 가옥들은 모두 불질러 태워 없앴고, 양곡도 운반하기가 힘들어 태워버렸어요. 처단한 주민숫자는 정확히 모르지만 후일 군재에 회부되었을 때 나는 1백87명이라고 증언했어요. 묘하게도 나의 군번중의 끝 숫자가 187로 나가고 있어 그 숫자를 잊을 수가 없어요. 군재 때 조사관이 현지에 가서 시체를 세어보니까 6백 명이 넘더라고 합디다만, 어떻든 나로서는 지금도 1백87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공비토벌을 하던 국군이 이렇게 주민을 집단 총살한 것은 『미 수복지역에 진주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주민을 처단하라』는 작명에 따른 것입니다.

<술대접한다 불러 경찰관몰살>
한동석 대대장이나 나나 모두 상부의 이작명을 수행한 것입니다. 또 이런 작명 이외에도 3대대가 그런 일을 저지른 이유가 있어요. 3대대가 일단 신원면을 수복, 경찰지서를 회복하여 경찰과 청년방위대원들에게 치안을 맡기고 대대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어요. 공비들과 이들과 내통한 주민들이 서원과 방위대원에게 술대접한다고 모이게 하고 모두 살해해버렸어요. 여기서3대대는 분노가 터졌고 주민들을 공비분자로 보게된 것이지요. 나는 23세 때 24세의 대대장명령에 따라, 끔찍한 일을 지휘, 집행했는데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악몽입니다. 사실 막연하나마 늘 마음이 불안해요.
20년 동안 입을 다물어온 「할말」이 아직도 많지만, 나는 신변의 보장 없이는 더는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김익열씨(당시 11사단부사단장=대령·예비역육군중장·현 대한양회협회 이사장·52) <9연대3대대가 공비소탕 중 주민을 많이 죽였다는 정보가 사단본부로 들어와 내가 사단장의 명을 받고 현지조사를 나갔어요. 내가 조사한 바로는 세상에 알려진 것과는 좀 다른 점이 있어요. 안의에 주둔하던 전투경찰대 소속의 어느 한 순경이 툭하면 밤에 거창등지에 나가 술을 먹고 술집여자를 희롱하고는 돈은 한푼도 안내고 돌아오곤 했어요.
이런 짓이 잦으니 술집주인들이 미워할 수 밖에요. 치안대에 고발 을하고 치안대에서는 그 순경을 혼내주기로 했대요. 어느 날 그 순경이 와서 또 그 짓을 하는 것을 붙잡아다가 20여명의 대원들이 뭇매질을 했다는 겁니다. 피투성이가 된 문제의 순경이 도망치다가 마침 이 지역으로 진주하던 제3대대의 수색대를 만났어요. 사유를 물은즉 순경은 그쪽의 치안대장이나 대원, 그리고 다른 공무원 할 것 없이 모두 빨갱이여서 내가 맞아 죽을 뻔하다가 겨우 도망쳐오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모양이예요. 3대대 수색대는 들이닥치면서 치안대원과 그 가족, 그리고 마을사람들 1백여 명을 집단 총살했어요.
세상에선 거창사건의 피살주민을 5백 명이니 6백 명이니 하는데 사실은 6·25초에 지리산 주변의 주민들에게 정부에서 소개령을 내렸는데도 듣지 않은 주민들을 더러 총살한 일이 있어요. 이들 유가족이 억울함을 말못하고 있다가 세칭 거창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에 희생됐다고 나섰어요. 나는 사단장에게 3대대장을 군재에 회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건의했지요.>
이상이 거창 집단총살사건에 직접 관련됐던 군 관계자들 이야기인데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피해자 숫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의 11사단 관련피고들이 군재 때 제시한 1백87명이라는 숫자도 처단지휘장교의 앞서 증언에서 보는바와 같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대대장이나 연대장은 지휘장교의 보고를 바탕으로 1백87명이라고 발표했을 것이다. 5백명 내지 6백명 설은 6·25초에 소개에 응하지 않은 일부 부주민을 처형했다는 증언에 비추어 그것까지 합친 숫자로 생각된다.

<부사단장 보고는 달라>
여하간 간혹 발생한 이런 사건 중 처형자 숫자에 있어서는 거창사건이 가장 많았다는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또 한가지 의문은 사건발생 동기에 대해 사단 내 관계자들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대대장과 연대장, 그리고 대대정보장교는 공비와 통비 주민들이 경찰과 청년방위대원들을 몰살했기 때문에 이들을 집단 총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단장의 명으로 이 사건을 조사한 부사단장은 민폐가 심한 어느 전투경찰관의 무고로 사단수색대가 치안 대원과 그 가족 1백여 명을 집단 처형한 것이라고 말하고있다.
이 말대로라면 피해자는 통비 분자가 아닌 양민인 셈이다.
부사단장이 조사한 이 사건이 제9연대3대대가 신원면에서 저지른 사건과 동일한 것인지 혹은 전혀 별개의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음 회에 다룰 생존자나 현지주민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집단총살이 신원면의 세 곳에서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별개의 사건인 것으로 생각된다.
◆주요일지(1951년4월17·18·19일)
※4월17일▲국군, 간성 탈환코 북진 ▲화천 북방일대에 적50만 집결 ▲미 합참본부의장「브래들리」원수, 한국전 불 확대 언명
※4월18일▲미군, 화천 탈환 ▲조방의옥사건, 군법회의에 회부 ▲국회, 거창사건 보고(비공개) ▲「애치슨」국무장관, 한국전 불 확대 언명
※4월19일▲미군, 철원남방3리 육박 ▲제주도의 잔존공비 75명이라고 발표 ▲「맥」원수,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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