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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의 전래와 그 기원적 계보|「김형규 박사 송수기념논총」 중 심재기씨 논문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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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이 한자문화권의 일원이며, 국어의 어휘사가 한자어휘의 증대사로 해석되는 것이 온당한 것이라면, 한자어에 관한 집중연구의 필요도 무시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한자폐지문제가 줄곧 대두되고 있지만 먼저 한자어에 대한 연원적 탐색이 앞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주장의 하나인 심재기씨(서울대 교양과정부전임강사)의 「한자어의 전래와 그 기원적 계보」(김형규 박사 송수기념논총게재)는 한자의 한국기원설과는 별개로 한자의 수입경로에 관한 연구로는 특이한 점이 있다. 다음은 그 논문의 요약이다.
한국의 고토에서 중국문화와의 본격적인 교섭이 시작된 것은 한이 만주일부와 한반도 북부에 사군을 설치한 BC108년을 깃점으로 해야한다. 이 때에 한자가 단편적으로 삼한국어에 함입되었고, 삼국초기 서력 기원을 전후해서 논어와 같은 유교경전이 일부 지배층에 알려졌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삼국에서 한자와 한자어를 제일 먼저, 그리고 풍부하게 사용한 나라는 지리적으로 봐서 고구려임에 틀림없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 서기372년에 태학을 세우고 유학을 가르쳤다. 또 국당이란 사숙이 성쟁했음을 보아 4세기에는 한자지식층이 형성됐을 것이다. 일상회화에서의 한자어사용도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장수왕 2년(414년)에 세운 광개토왕비의 한문문장은 당시의 한자수용력과 활용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백제는 그 지배족이 북방계였으므로 한자어가 많이 쓰였을 것이다. 4세기 중엽 아직기·왕인 등이 일본에 한자를 전한 것을 보면 쉽게 짐작되는바다. 개로왕이 북괴에 보낸 도서는 백제의 한문수준을 확인케 하는 명문이다.
신라는 한문을 조금 늦게 수입했지만 555년에 세운 진흥왕순수비는 당시의 한문 구사 능력을 엿보게 한다. 또 552년 임신서기석, 6세기말에 창작되기 시작한 향가도 한문의 일반화를 말한다.
한반도 통일이후 신라는 신문왕2년(682) 국학을 설립했지만 한자어의 구체적 사용은 757년(경덕왕 16년)의 한자지명제, 759년의 관명개칭부터다.
부여·고구려·옥저·예 등 북방계 언어와 마한·신한·변한 등 남방계 언어가 통일신라의 성립으로 신라어를 근간으로 언어상의 통일을 기했을 때 한자어는 국어의 어휘에 중요한 위치를 점했던 것이다.
8세기께 벌써 신라어의 고유명사들은 거의 한자어가 됐으며 당문물의 유입으로 문화적 지적 개념어가 한자어로 대체되었다.
통일된 언어를 갖는 순간 전통언어의 순수성은 상실되고 외래어인 한자어의 침식을 받은것이다.
그러면 당시의 한자음은 무엇이었을까? 「칼그렌」은 6백년께 수·당초의 북방중원음이 한국한자음의 바탕을 이루었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6, 7세기께의 「절운」이 신라 한자음의 전형이라고 속단키는 어려운 일이다. 한자어의 계보는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중국을 통해 유입된 한자어는 한국 한자어의 태반으로 ①중국을 전통적 고전 문헌에 쓰인 한자어로 선왕·화목·부모·사친·부귀·근신·오락·평생 등의 유가사상의 핵심용어들 ②중국문적을 통해왔으나 중국자생이 아닌 불교 한자어이다.
이는 범어의 음역인 가람·가사 등과 다른 한가지는 번역된 불교어인 화두·공부·무명·세간·견성·출가 등의 말이다. ③중국에서 서적이외의 방법으로 들어온 사물의 명칭 즉 서양문물의 중국제어·중국국어 백화문으로는 합당·등한·십분·다소·점검·종전·타파·용이 등이 있다.
한자어의 또 다른 광맥은 일본이 컸다. 개화가 빨랐던 일인들은 많은 학술용어를 한자로 빌어 적었으며 그 영향은 현재에도 많이 남아있다. 대가·생산고·부지·상호·상담·납득·약속·역할·흑판·청부·입구·안내·조인·당번 등.
한자어생성의 주인공으로 한국자체가 손꼽힐 수 있다. 가령·채독·감기·환장·고생·한심·사주·서방·도령·사돈·생원 등은 한국에서 생성된 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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