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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맥아더 원수 해임(4)|유럽제일주의(1)|6.25 21주 3천여 증인 회견. 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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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외교정책의 기본은 원래가 『유럽제일주의』이지만 아시아에서 한국전쟁을 치르면서도 워싱턴의 그런 정책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트루먼과 맥아더와의 대립도 근원은 워싱턴의 유럽제일주의에 대한 후자의 도전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트루먼은 북괴의 남침을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정복음모의 시발로 보고 한국전에 개입하는 동시 유럽에 나토(북대서양동맹조약기구)라는 집단방위기구를 서둘러 구축했다. 이렇게 볼 때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워싱턴은 유럽제일주의에 더욱더 기울어지게 됐다. 맥아더로서는 열전장인 아시아 전쟁에 전력투구하지 않고 여전히 유럽에 치중하는 워싱턴태도가 몹시 안타깝고 또한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의 도전은 처음부터 외롭고 승산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투르먼을 둘러싸고 있는 정책수립자들 거의 전부가 유럽제일주의자들 이었고 아시아에 대해서는 별로 깊은 관심들이 없었다.
우선 딘·애치슨 국무장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6·25전란에 이미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위인이었다. 조지·마셜 국방장관은 전후 유럽에 이른바 마셜 부흥계획을 입안 실시했고 실패한 국공합작의 산파적 역할도 했었다. 모택동 일파를 공산주의자가 아닌 한낱 농지개혁주의자로 판단하고 국공합작을 주선할 정도로 마셜의 대중공관은 만주폭격과 해안봉쇄를 주장한 맥아더와는 거리가 멀었다.

<유럽 우선에 맥아더안 무색>
합참본부의장 오머·부래드리 원수는 2차 대전 중 아이크 밑에서 조지·S·패트 장군(주=영화 패튼 대전차군단의 주인공)과 함께 군단장으로 아프리카 시칠랴도 노르망디상륙 등 유럽에서만 싸웠지 아시아에는 와 본적도 없었다. 트루먼의 정책수립에 많은 영향력을 준 애버럴·해리먼 역시 2차 대전 중 주소미대사를 오래 역임했던 만큼 자연히 유럽에 더 많이 눈을 돌렸다. 이렇게 당시의 미 국무·국방성요인들은 유럽제일주의자들 일색이었다. 이들이 중공개입 전에도 인천상륙 38선 돌파 등 맥아더 작전에 브레이크를 건 것은 한국전의 확전으로 유럽방패인 나토강화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므로 워싱턴은 중공 개입 후 북경정권과의 전면전쟁을 절대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맥아더의 신화적인 성가나 위신을 가지고도 유럽제일주의자들의 두꺼운 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중공 개입 후 워싱턴이 한국에서 자꾸 뒷걸음질치며 만약의 경우에는 물러나려고까지 생각한데는 유엔 안의 미 동맹국, 특히 유럽 동맹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알다시피 미국은 처음에 세계경찰 행사를 한다고 유엔군이란 당당한 세계관군의 깃발을 들고 한국전쟁에 개입했었다. 그래서 상징적인 병력이기는 하지만 15개 회원국이 주력미군과 함께 한국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런데 막상 중공대군이 개입하자 참전회원국은 미국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 이 무렵에는 현실적으로 유엔을 통한 개입이 오히려 거추장스럽게 되기도 했다.
이런 아이러니컬한 사실을 미전사가 T·R·페렌버크는 그의 저서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다음과 같이 비꼬고 있다.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할때 내건 유엔의 간판은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그해 6월에 유엔은 미국의 지도권에 대해 거의 전폭적으로 호응했고 그 결과 미국은 뒷받침아래 국가정책을 실천해야만 했는데 당시로서는 이것은 큰 승리였다. 그러나 중공이 끼어 들고 미군이 북한에서 총퇴각하고 또 전쟁확대의 전망이 짙어지자 여러 유엔 회원국들은 갑자기 미국말을 듣지 않고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불행히도 미국의 지도권은 전쟁터에서 그 명성을 거의 잃고 말았다(주=11월 하순의 맥아더 종전공세의 실패를 뜻함) 1950년12월1일 이후로는 어쩌다가 깊은 생각 없이 이 엉뚱한 나라 일에 끼어 들게된 동맹국들이 미국에 대해서 다시는 무제한 신용장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12월1일까지 대부분의 유엔 참전국들은 엉망이된 한국으로부터 빠져나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패색 짙어지자 미국말 안 들어>
신의상의 문제는 어찌됐건 분단된 한국의 운명을 둘러싸고 중공과의 전쟁을 계속하는데 어떤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는 회원국은 별로 없었다. 작은 나라들은 그 전쟁에 뚜렷한 도의적인 목적이 있고 자기들에게 별로 큰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한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소규모의 분쟁에 미국말을 들어 개입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지구는 전면전쟁 일보직전에 놓이게 되었고 중공을 쳐부순다는 것은 유럽 사람들이 볼때에는 뚜렷한 도의적 목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상 유례없는 파괴적인 전쟁이 막을 내린지 불과 5년만에 정말 자기보존이란 절박한 사정이 아니면 그 밖의 어떤 이유로도 원자전쟁의 위험을 무릅쓰려는 국가라고는 없었다. 미국의 정책은 유엔의 수많은 모순된 정책 속에서 산출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엔 회원국의 대부분은 가급적이면 곧 전쟁이 종결되기를 바랐다. 미국은 그 자체의 희망은 어찌됐든 간에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한국전에 개입했을 때 애치슨 국무장관은 전쟁에 개입한다는 결정이 『언제나 지금처럼 인기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안가서 애치슨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미국의 한국전 개입을 공산 측이 예상 못했듯이 워싱턴도 중공군이 설마 압록강을 건너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이것은 누구의 잘잘못을 가릴 것 없이 워싱턴이나 동경이 다같이 오판한 것만은 틀림없다. 이런 새로운 사태에 대해 맥아더는 확전으로 대하려했고 워싱턴은 6·25전의 현상유지로 대처하려고 했다.
그러나 적어도 트루먼 자신은 중공개입초기에는 유엔에서 한국전 개입 때와 같이 절대지지를 얻는다면 맥아더 확전 안에 동의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의회나 여론 등 상당한 제약이 있지만 그래도 대통령중심제인 미국에서 트루먼은 한국전개입을 거의 독자적으로 결정한 것처럼 중공에 대한 응징조치도 취하려면 능히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트루먼의 급선회』 혹은 『원자탄 충격』이라고 부르는 이 문제의 내막은 이러했다. 중공의 전면개입으로 맥아더의 종전공세가 실패하고 유엔군이 총퇴각할때인 1950년11월30일에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트루먼 "원폭사용" 성명 불발>
『한국에서 일어난 최근사태는 세계를 중대한 위기 속에 몰아넣었다. 우리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이새로운 사태에 대처할 것이다. 첫째는 한국에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유엔에서 계속 공동으로 노력하며 둘째는 다른 자유국가들의 방위력 강화를 도울 것이며 세째는 미국자신의 국방력을 증강하겠다. 우리는 유엔의 영향력이 한국의 새 사태에 미치도록 전력을 다할 것이다.』 끝으로 트루먼은 중국본토에 대한 공격, 해안봉쇄 또는 폭격 같은 조치는 유엔의 반향여하에 달려있음을 분명히 하고 원자탄이 아직도 미국의 무기창고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경우에 따라서는 원폭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이같은 트루먼의 기자회견은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특히 유럽의 미 동맹국들에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을 주었다. 대부분의 유엔 대표들은 아시아에서 원자탄을 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파멸을 초래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윈스턴·처칠은 하원에서 유럽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아시아사태에 말려들어 가서는 안된다고 경고했고 클러먼트·애틀리 수상은 12월2일에 부랴부랴 워싱턴으로 날아가 트루먼의 고삐를 잡았다. 이제 미국은 중공문제에 대해 동맹국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금시 알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면전쟁, 특히 핵전쟁을 회피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개입 석달지나 침략자 규정>
이래서 트루먼의 원자탄성명은 불과 며칠만에 문자그대로 불발탄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맥아더의 실각은 이미 이때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이때 유엔의 다수회원국이 북괴 남침 때처럼 신속히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했더라면 세계나 아시아 운명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로 유엔에서 중공을 침략자로 낙인찍은 것은 유엔군이 1950년10월25일 중공군과 처음으로 교전한지 3개월5일 만인 이듬해 2월1일이었다(44대7기권9). 그것도 유엔군에서 1950년12월14일에 가결한 휴전호소결의를 중공이 거부한 후에야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 3개월5일 동안은 맥아더는 한국에 들어온 중공군과 아무 명분 없이 싸운 셈이었다. 그가 회고록에서 『유엔과 워싱턴이 빚어낸 정책의 진공상태 때문에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뼈를 깎는 고민을 맛보았다』고 술회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주요일지(1951년3월27·28·29일)
※3월27일▲B-29, 북한각지 대폭격 ▲학제를 6·3·3으로 단일화 ▲마셸 국방, 38이북에 대한 전면진격은 정치적 결정필요 언명 ▲영외무성, 한국참전국·대중공신협상검토중이라 언명.
※3월28일▲춘천 주변서 격전 ▲김백일 소장비행 중 실종 ▲중공, 끝까지 항전성명 ▲오리올 불 대통령 방미.
※3월29일▲B-29, 신의주 철교폭격 ▲l950년말 현재 세계인구 23억8천6백만명 ▲중공, 맥 원수성명 거부 ▲트루먼, 38이북진격은 전세여하에 따라 결정언명.
※알림=거창사건의 관계자료나 사진을 가지고 있는 분은 중앙일보편집국 민족의 증언 담당자 앞으로 연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화(28)8211(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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