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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제22화>부산 통화개혁|김유택(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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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은행 백원권 교환을 끝낸 후 한은은 본격적인 화폐개혁의 필요성을 면밀히 검토한 다음 백두진 국무총리서리 겸 재무부장관(현 국회의장)의 승인을 얻어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이대통령은 『빨리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계획은 또한 당시 한미합동 경제위원회 미국 측 대표인 「B·H·해튼」소장의 양해도 얻어야 했다. 전쟁으로 우리경제의 대미 의존도가 몹시 높았기 때문에 중요한 경시정책은 합경위 승인 없이 집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합경위의 미국 측 위원은 「해룬」소장을 비롯, ECA와 주한미국 대사관 관리들이었고, 우리측은 백 재무장관·나(필자) 그리고 몇 사람이 더 있었다.
당시의 인플레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가는 우선 화폐 발행고에서 입증되고 있다. 해방직 후 ▲90억원이던 발행고가 ▲50년 6월12일 한은이 조선은행 후신으로 발족할 무렵엔 5백57억원 ▲51년 3윌 말 3천3백81억원 ▲52년 3월말 6천 억원이 됐다. 이해 말에는 ▲1조원을 돌파, 화폐개혁 바로 전남인 ▲53년 2윌14일에는 1조1천3백67억원을 기록했다. 원대 원의 교환 비율을 1백대1로 정한 것도 해방 직후보다 무려 1백 배 이상이나 늘어난 화폐발행고를 감안, 물가의 거래단위를 해방직후 수준으로 접근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화폐발행고가 가속도적으로 증가하는 동안 처음에는 이것을 따르지 못했던 물가등귀율이 점차 속도를 얻어 통화증가율을 앞지르게 되어 1년간 간절이 뛰었으며 특히 53년 정초부터 물가는 전례 없이 폭등, 경제는 파국적인 초 인플레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 때처럼 돈이 흔하고 값없는 세상도 없었던 것 같다. 거래량이 많은 곳에서는 돈을 세지 않고 대강 눈짐작으로 하거나 저울에 달아 주고받기가 보통이었다. 요즘같이 수표 거래도 별로 없었고 대부분 현금 거래였기 때문에 가마니 단위로 돈을 나르는 일이 허다했다. 트럭을 사러 가는 운수업자가 삼륜차에 돈을 가득 싣고 가는 풍경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화폐의 존엄성이 땅에 떨어진 시절이었다.
이 같은 인플레 수속의 필요성 이외에도 화폐개혁을 촉진시킨 다른 요인으로 전쟁발발 후 2년 반 동안 계속돼온 유엔군에의 대여금 지급중단을 들 수 있다. 아울러 그때까지 누적된 유엔군 대여금채권을 달러로 상환 받게 됐으며 앞으로 유엔군의 소요 원화는 달러로 사가기로 했던 것이다.
또한 휴전설이 나돌면서 UNKRA(유엔 한국부흥 재건위원단)부흥계획도 수립됐다.
이 같은 여건변화에 따라 새로운 통화체제의 구축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건의한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화폐계획 같은 중대사는 모두 정부가 주동이 되어 결정하고 일일이 간섭하러들겠지만 당시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2·15 긴급통화조치는 정부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앙은행의 건의에 따라 취해진 것이며 한은의 의견이 이만큼 존중되고 받아들여졌다는데 대해 한은 임직원들은 굉장한 프라이드를 느꼈고 한층 적극적인 자세로 준비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내가 백두진 재무장관으로부터 직접 준비작업의 지시를 받은 것은 화폐개혁 약 6개월 전인 52년9월로 기억된다. 나는 즉각 조사담당 송인상 부총재(현 한국경제개발협회회장)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스터디·그룹」을 편성토록 지시했다.
수석부총재(현부총재에 해당)는 이 무렵 마침 공석 중이었고 부총재(현 이사)는 송씨 외에 김진형씨(현 한국개발금융사장) 박숙희씨(현 한비사장) 전례용씨(전 건설부장관) 김영찬씨(전상공부장관) 등이었다.
송 부총재는 조사부장 이상덕씨(현 주택은행장) 조사부기획조사과장 김정렴씨(현 대통령비서실장) 동 과장대리 배수곤씨(현 한은부총재)세 사람을 불러왔다.
우리 5명은 백 장관 앞에 가서 『기밀을 누설했을 때는 총살형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엄중한 서약서를 쓰고 나왔다. 나는 이 조사부장에게 준비작업의 진행 책임을 맡게 하고 김 과장과 배 대리로 하여금 계획내용을 입안토록 업무를 분담시켰다.
이리하여 당시 한은의 젊은 엘리트로 꼽히던 김·배 두 사람은 송인상 부총재 지도아래 각국의 통화개혁 예를 토대로 대통령 긴급명령·긴급 금융조치법 등의 법령과 모든 부수조치를 비밀리에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미 대통령 지시도 받았고 서약서도 써 낸 뒤라 이제부터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김·배 팀이 하는 일의 기밀을 완전히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전과장의 호텔 및 여관행각이 시작됐다. 처음에 든 곳은 부산시내 광복동의 미진 「호텔」. 방 하나를 얻어 1주일 계속 드나들더니 하루는 나한테 전화가 왔다. 『호텔 주인이 거동이 수상하다고 경찰에 연락해서 지금 형사가 잡아가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진헌식 내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은 나의 심부름으로 일을 하고 있으니 연행하지 말아달라』고 부탁, 첫 위기를 모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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