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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맥아더 원수 해임 (1)|「6·25 21주…3천여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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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국 전쟁에 있어 서방 세계의 입장에서 볼 때 주역은 「해리·S·트루먼」과 「더글러스·맥아더」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괴가 남침하자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신속히 한국전 개입을 결정했는데 이와 같은 중대 결정은 그가 처음부터 거의 독자적으로 취한 것이었다 (주=본 연재 15·16·17·18·19회 참조) . 만약 이때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 개입을 조금이라도 주저했더라면 한반도는 쉽사리 적화됐을 것이다. 일단 미국이 한국 전쟁에 손을 댄 후부터는 「맥아더」 원수가 주역으로 등장했다. 특히 「한국 전쟁」을 흔히 「맥아더」 전쟁이라고 일컬을 만큼 원수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한국전의 이 두 주역이 대립하여 결국 1951년4월13일 노병의 해임으로 막은 내리기까지의 경위와 배경을 살펴보면 미 정책의 변모, 전쟁과 세계관의 차, 당쟁·개인 성격 등 작금의 세계 정세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사실과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트루먼」과 맥아더」의 위화감은 개인적인 성격과 성분이나 관록에서부터 숙명적으로 비롯했다고 볼 수 있다.

<웨이크도 회담서 첫 대면>
둘이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l950년10월15일의 「웨이크」 회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맥아더」는 해임되어 귀국할 때까지 15년 동안 줄곧 「아시아」에만 있었지 한번도 본국에 다녀온 적이 없었다.
회담 장소를 「워싱턴」으로 정하지 않고 동경과 미국의 중간 지점인 「웨이크」섬을 택했다는 것부터가 「트루먼」이 「맥아더」에 늘 위구와 열등감을 품고 있던 징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맥아더」는 미 군부에서 가장 선배 원로로서 2차 대전 때 「유럽」에서 세운 전공으로 영웅이 된 「드와이트·아이젠하워」도 「맥아더」가 중장이었을 때 겨우 소령이었음을 볼 때 「트루먼」의 합참본부 막료들인 「오머·브래들리」 원수나 「로튼·콜린즈」「호이드·밴덴버그」「포레스트·셔먼」등 각 참모총장은 까만 후배였다. 또한 아직도 깨지 못했다는 「웨스트포인트」(육사) 의 수석 성적 기록과 함께 태평양전쟁에서의 전공, 그리고 타고난 극적인 자기 연출 기술 등이 겹쳐 원수는 거의 신격화되다시피 했었다.
한국 전쟁에서는 합참 본부의 강력한 반대를 설득해서 감행한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적어도 중공군이 출현할 때까지는 「트루먼」은 전쟁 수행을 거의 원수에게 일임했었다. 이래서 「맥아더」는 6월29일의 이북 함포 및 폭격 명령, 38선 돌파, 한만 국경 진격 제한 해제 등의 중대 조치를 「독단 전행」아니면 「워싱턴」을 강력히 유인해서 단행했던 것이다(주=본 연재 184·185·186·198회 참조). 이러한 「맥아더」의 위신과 관록에 비하면 「트루먼」은 별로 빛나는 존재는 못됐다. 「프랭클린·루스벨트」의 사망으로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계승했으며 1948년 선거 때에도 「시카고·데일리·트리뷴」지가 공화당의 「토머스·듀이」 후보의 당선을 성급히 오보할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
그의 업적 중 두드러진 것을 굳이 꼽는다면 일본에 대한 원폭 사용 결정과 한국 전쟁 개입을 들 수 있었다. 이래서 「트루먼」 마음속에는 항상 「맥아더」는 『무시 못할 다루기 힘든 달갑지 못한 인물』로 못 박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대만 중립화 정책에 도전>
출신 성분도 부친이 「필리핀」 총독을 지낸 군 귀족 계급에다 철저한 성공회 신자인 「맥아더」와 「미주리」주의 가난한 근로형의 농부였던 「트루먼」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성격과 배경에서 둘이 한국 전쟁 중 정책적으로 처음으로 날카롭게 대립한 것이 중공과 대만에 관한 문제였다.
이는 오늘의 중공 득세와도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한결 더 회고의 가치가 있다 하겠다. 이 문제를 둘러싼 둘의 알력은 6·25 동란 발발 월여 만인 7월31일에 「맥아더」 원수가 직접 대북을 방문함으로써 발단되었다. 이보다 앞서 장개석 총통과 「맥아더」와의 접근은 「타임」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즉 7월14일호의 「타임」지는 『장 총통을 개인적으로 몹시 존경하고 있다』는 「맥아더」 담화가 게재되었고 이어 2주 후에 이번에는「맥아더」 장군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며 국부의 운명을 그의 손에 맡길 용의도 있다』는 내용의 장 총통 성명이 소개되었다.
한편 미 국가 안전 보장 회담은 7월27일에 합참 본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부에 대한 군사 원조 제공에 동의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미7함대로 대만 해협을 차단하고 중공과 국부간의 충돌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중공이 대만을 공격해도 안되지만 국부도 본토에 반공할 수 없다는 이른바 대만의 「중립화」 조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워낙 국부의 군사력이 약하고 중공과의 균형이 기울기 때문에 대만에 다소의 군사 원고를 제공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장 총통이 본토를 잃은 후 미국이 국부에 제공하는 첫 군사 원조였다.
「워싱턴」은 「맥아더」 사령부에 국부가 절실히 필요한 군수품이 무엇인가를 조사하도록 시달했다. 국무성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맥아더」 자신이 직접 대만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원수는 이 기회에 장 총통과 만나려고 7월31일에 대북으로 비행했던 것이다.
「유엔」군 총사령관, 미 극동군 사령관, 일본 점령 미군 사령관 등 「맥아더」에게 주어진 직책 자체가 본연의 군무와 함께 다분히 정치성을 띤 것이었지만 그는 이 대북 행을 계기로 더 깊숙이 정치에 휘말려 들게되고 이에 따라 「트루먼」과의 대결도 외곬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30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대만을 방문한 「맥아더」원수는 2일 동안 장개석 총통과의 회담을 마치고 돌아와 8월1일에 『대만이 공격을 받을 경우에 미군과 국부군 간의 효과적 협조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말하고 『장 총통의 투철한 반공 투쟁은 미 국민의 공통의 관심과 목적에 부합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본토 수복」에 미 개입 않으려>
한편 장 총통도 「맥아더」 원수의 회담으로 대만의 공동 방위와 미·국부간의 군사 협력의 바탕이 마련됐다』고 설명하고 『우리가 태평양전쟁 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운 옛 친구와 다시 손잡게된 이상 공산주의에 대한 최후 승리는 확실하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풍전등화격의 국부가 한국 전쟁의 발발과 뒤따르는 「맥아더」 원수의 방대로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은 장 총통의 이 성명으로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장 총통과 「맥아더」의 이 같은 성명에 몹시 당황한 것은 「트루먼」과 「딘·애치슨」 국무장관이었다. 우선 「애치슨」 장관은 「맥아더」가 「트루먼」 행정부의 대만 「중립화」정책을 무시하고 국부군의 본토 반공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지 않았는가 하고 즉시 동경 주재 국무성 대표 「윌리엄·시볼드」에게 경위를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이에 대해 「맥아더」는 장 총통과의 회담엔 비정치적인 것만 다루었다고 해명하면서도 자기의 대만 방어 임무가 대북 주재 미국무성 외교관들의 장 총통에 대한 비우호적인 태도 때문에 지장을 받고있다고 불평했다 (주=대만 중립화 조치에 따라 「맥아더」 원수는 대만 방어 임무도 맡게 됐었다).
이는 분명히 미국은 장 총통 정권과 보다 더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어야한다는 정치적 견해를 제시한 것이었다.
한편 「트루먼」 대통령도 「맥아더」가 미국의 대만 정책에 이의를 제시하고 있는데 대해 설득 특사로 「애버럴·해리먼」을 동경에 파견했다. 「해리먼」 특사는 「맥아더」에게 미국과 국부간의 기본적 이해 관계 대립을 지적하고 국부의 본토 수복은 미국의 전면 개입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지만 미국으로서는 그런 사태에 절대 말려들여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물론 「해리먼」의 이런 주장은 「트루먼」과 「애치슨」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대통령이 내리는 어떤 명령에도 복종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해리먼」 특사는 이때의 「맥아더」와의 회담 인상을 이렇게 분석했다. 『나는 대만과 장 총통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대해 「맥아더」와 완전히 합의를 보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맥아더」는 대통령 입장을 이해한 것 같았지만 확신은 갖지 못했다. 그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사람은 누구든지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는 「유엔」에서 우방 제국간의 보조를 맞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대만 문제를 조금이라도 잘못 처리한다면 큰일이 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워싱턴」의 견해를 충분히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맥아더」는 미국 정책이 장개석 정권의 근본을 파헤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트루먼」은 「해리먼」특사의 보고를 받은 후 기자 회견에서 자기와 「맥아더」는 대만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한다고 말했다.

<행정부의 패배주의 규탄>
그러나 8월10일에 「맥아더」는 자기 방대가 순전히 군사적인 것이었다고 전제하면서도 『이 방문을 가지고 태평양 지역에서 과거에 항상 패배주의와 유화 정책을 선전해온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와전하고 있는데 나는 미 국민이 이런 교활하고도 난폭한 기만 술책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분명히 「트루먼」 행정부의 패배주의와 유화 정책을 규탄한 것이었다.
양보와 설득으로 대해 오던 「트루먼」도 「맥아더」의 8월10일 성명에는 분통을 터뜨리고 단단히 어떤 「재갈」을 물려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이래서 8월14일에 국방장관과 합참본부 의장으로 하여금 「맥아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전달케 했다. 『귀관은 대만을 외부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임무와 함께 국부의 본토 반공을 저지할 책임도 있다. 미 육해공군 총사령관인 대통령 이외의 어느 누구도 중국 대륙의 병원 집결지에 대한 예방 전쟁적 행동을 명령 내지 승인하는 권한이 없다.
미국의 가장 사활적인 이익은 우리 행동이 전면 전쟁을 유발하거나 유발할 구실을 타국에 주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다. 』
◇주요일지 (1951년3월18·19·20일)
※3월18일 ▲전 전선서 접적 없음 ▲중공 당국,「캐나다」수녀 5명 체포
※3월19일 ▲적, 38선 이북으로 패주 중 ▲1백12명의 정부 선발대, 서울 출발 ▲중공, 5만8천명의 서울 시민 납치 ▲「이란」에 계엄령
※3월20일 ▲국민 방위군 교육대 해산 ▲한국의 중공군사령관에 팽덕회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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