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제자는 필자>|<제21화>미·소 공동 위원회 (16)|문제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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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브라운의 평양 행>「브라운」 대표가 북한의 정당 사회 단체 대표들과 만나 임정 수립과 그 헌장, 정강에 관해 의견을 나누기 위해 평양으로 간 것은 6월29일이었다.
「브라운」은 서울역에서 특별 열차로 평양으로 가서 열차를 평양역에 세워놓고 그 곳을 숙소로 사용하면서 북조선의 정당 대표들을 만나고 합동회의를 가졌다.
「브라운」은 평양에 도착한 이튿날인 1일에 모란봉 극장에서 합동회의를 가졌는데 이 회의에는 북조선의 3개 정당과 35개 단체가 나왔다.
북한의 이들 정당·단체들은 모두가 소위 민주주의 민족 전선이나 북조선 인민 위원회와 관계를 가진 것들이어서 도저히 합동회의의 의의를 살릴 수가 없었다.
등록 단체들은 노동 조합 21개, 문화 단체가 5, 종교 단체 3, 후생 단체 2, 사회 단체 2, 농민 조합 1, 여성·청년·기술 동맹이 각 1개씩이었다.
소련군은 합동회의서 김일성을 내세워 지도자라고 부르는 등 일방적인 의견만 내놓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브라운」이 합동회의에 참석했을 때 소련군 측은 인쇄된 공동 「코뮤니케」를 내놓았다. 그런데 이 문안에서 김일성을 추켜세워 「지도자」라고 한 것이었다. 이 선언문은 노어로 되어 있었다.
「브라운」을 수행했던 노어 통역관은 고정훈이었다. 고씨는 어째서 김을 「지도자」라고 했느냐고 따지게 되었는데 소련군 대표를 위한 북의 통역관은 남일이었다.
그런데 지도자란 말의 노어는 「루코·보지첼」이다. 이 말은 원래 타수란 뜻인데 정치 용어로서 지도자란 뜻으로 쓰이는 것이었다.
이 말은 손 (루코)을 움직인다 (보지첼)의 두 말의 뜻이 합해서 된 것인데 이 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고정훈과 이 말을 쓰겠다는 남일과 언쟁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화가 난 고씨가 「보지첼」이란 말 중의 「스펠링」 2개를 바꾸면 「마스터베이션」이란 말이 되는 것을 이용, 『지도자가 아니고 「마스터베이션」김이다』라고 말해버렸다.
이것이 말썽이 되어 소련군 측은 고씨를 파면해야만 회의를 하겠다는 등 크게 싸움이 벌어졌다. 놀란 「브라운」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경위를 묻게되어 고씨가 『우리가 인정해준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제멋대로 지도자라고 하는 것이니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냐』고 설명하자「브라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적절히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휴전 회담에 나온 남일이 바로 이자였다. 「브라운」은 평양에 5일 동안 있었으나 아무 진전도 없었다.
다만 소련군의 알선으로 연금 상태에 있던 조만식을 평양역에 세워둔 「브라운」의 특별열차의 응접실에서 회견한 일이 있었다.
이때 「브라운」은 조만식에게 『선생께서 원하시면 남으로 모시겠읍니다』고 제의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통역은 허현 (고인·「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등 역임) 이었다.
그러자 조만식 선생은 『무슨 소리, 내 죽어도 여기서 죽을 것이오』하고 한마디로 거절했다는 것이다.
「브라운」은 조만식이 돌아간 뒤 허현에게 『조만식은 애국자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은 조·「브」·허의 셋밖에는 모르는 비밀이어서 「브라운」은 허현에게 2년 동안은 이 일을 누설하지 말도록 정식으로 함구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일은 뒤에 6·25가 나서 피난살이 할 때 부산에서 허현이 같이 통역으로 「브라운」을 따라갔던 고정훈을 만난 자리에서 반가운 나머지 옛날 이야기의 꽃을 피우다 얼핏 뇌까렸다는 것이다. 북한에 있던 조만식은 공위를 싸고 꿋꿋이 싸웠다.
45년12월23일 신탁 통치가 발설되었을 때 「치스차코프」는 조만식을 그의 사령부로 불렀다. 그리하여 3상회의 결정인 신탁 통치에 대해 의견을 말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치스차코프」는 찬성하는 것이 소련군의 「지도 노선」이니 찬성을 표명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찬성하는 것은 공산당뿐인데 소련군은 즉석에서 조선 민주당 조만식의 동의를 얻으려고 한 것이었다.
조만식은 그 자리에서 『조선이 완전 독립국으로서 자유 정부가 출현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신탁 통치는 절대 반대한다. 나는 국내의 정세를 살핀 뒤 완전한 의견을 표명하겠다』고 말했다. 이것은 조선 민주당의 주장이기도 했다.
그 뒤 한달 후인 46년1월26일 조만식은 『신탁 통치는 절대로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조선 민주당의 의견으로서 「치스차코프」에게 정식으로 통고했던 것이다.
조만식은 소련군을 등에 업은 김일성의 끈덕진 협박 회유를 물리치고 반탁을 끝내 선언하자 소련군은 조만식 선생을 고층 「호텔」에 연금 해 버린 것이었다. 이 판국에 조만식을 만난 「브라운」은 조만식이 『세상을 내다보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브라운」이 조만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브라운」은 7월5일 빈손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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