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폴·발레리 탄생 백주|현대 문학에 끼친 그의 영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20세기 초 「프랑스」의 대표적 시인인 「폴·발레리」에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최근 그의 탄생 1백주를 전후해서 활발해지고 있다. 지난 10월30일의 그의 1백주를 맞아 「르·몽드」지는 「발레리」의 생애와 문학, 오늘날 비평가들이 보는 「발레리」등을 특집으로 엮었고 또 그의 1백주 기념 출판 등도 계획되고 있다. 「발레리」가 현대 「프랑스」문학에 끼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며 그의 시작법은 오늘에 와서도 그대로 쓰여지고 있다. 「발레리」가 20세기 초기가 아닌 현대의 작가였더라면 더욱 유명했을 것이라고 어떤 비평가는 말하고 있다. <르·몽드=본사특약>
그는 상징주의의 전통위에 완전한 미적·시적·순수성의 이상을 추구한 시인이었다. 그의 문학적 태도는 사물을 회의적으로 철저하게 사고하며 문학의 본질로부터 철학적 사색의 방향으로까지 이끌어갔다.

<남불서 유년 시절|깊은 사고력 길러>
「발레리」는 1871년10월30일 동시대의 대표적 소설가인 「마르셀·프루스트」보다는 3개월 늦게 남 「프랑스」의 지중해 해안「세트」에서 태어났다.
상점의 점원을 아버지로 두었던 그는 「데카르트」「말라르메」등을 열심히 읽었고 소년시대를 밝은 태양이 내리 쬐는 지중해 해안에서 주로 살아 그의 사고의 깊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몽펠리에」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지만 취미는 시와 건축 등이었고 「앙드레·지드」등과 친교를 갖고 「말레르메」의 문하에서 시를 공부했다.
『나는 소설이나 희곡을 위해서는 존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듯이 그는 시에 대한 집념이 강했었다. 그의 시에는 항상 순수한 시적 「이미지」와 아름다운 언어의 음악성이 합쳐져 있고 맑으면서도 생동감이 흐르고 있다.
「말라르메」가 죽은 후 한때 문단과 인연을 끊었던 그는 1911년 「지드」의 권유로 다시 시작에 착수, 5년만에 장시 『젊은「파르크」』를 완성했다. 한 여성의 독백 형식을 빌어 관능적 의식 세계를 노래한 이 장시는 20세기 초반 「프랑스」최고의 서정시로 각광을 받았다. 20년 발표한 『해변의 기지』에서는 삶과 죽음의 철학을 노래했었다.
수학·물리학 등 과학적 방법으로 사물을 깊이 고찰하는 그는 작품의 소재로서 문학·철학뿐 아니라 무용·건축·미술·교육·정치·문명 등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양심과 지성 겸비|상징주의의 정통>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불안과 위기의 시대에는 『정신과 위기』등 문명 비평론을 발표, 주목을 받았고 그 후 그의 발언은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소리가 되었었다.
24세 때 『「레오나르도·다·빈치」방법서설』을 발표, 각광을 받았던 그는 1925년 「아카데미·프랑세즈」의 회원이 되었고 1945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나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오늘날 비평가들은 「발레리」를 한가했던 작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비평가 「제라르·즈네트」는 「발레리」는 정상에 있었던 위대한 작가이며 또 위대한 정신의 창조자였지만 결코 한 작품에 얽매일 수 없었다는 것이며 한가한 작가이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고뇌의 작가였다는 것이다.
또 평론가 「필립·솔레르」는 「발레리」를 마지막 「부르좌」 문화 시대의 작가를 대표한다고 말하고 「지드」나 「클로델」「아라공」「카뮈」등과는 달리 양심과 지성을 갖춘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
「말라르메」의 정통 후계자며 「프랑스」상징주의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시인으로 불리는「발레리」의 시와 산문은 명확한 용어, 엄밀한 사고, 단정한 기법, 견고한 구성으로 음악적 건축적 조화까지 이루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