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50)국민 방위군 사건 (9)|고등 군법 회의 (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국민 방위군 간부들의 부정 사건에 세론이 격분한 것은 크게 보아서는 눈앞에 아롱거리던 통일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와해된 데 대한 민족적 좌절감에 겹쳐 이 의옥 사건 때문에 직접간접으로 입은 피해 대상은 거의 전 국민에 해당된데 비롯했다. 직접 고초를 겪은 50만 대원은 물론, 그들 가족과 친지까지 합한다면 수난자는 어마어마한 수에 달하며 이들 「입」에서 나오는 원성과 규탄의 소리는 거셀 밖에 없었다. 정부로서는 국민의 이런 「격분의 물결」을 어느 방향으로 유도해 진정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분노의 물결은 정부 자체를 삼킬지도 모른다는 것을 위정자들은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이래서 국민 방위군 사건 군제에는 여론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시 군제 관계자들의 이야기.
▲이종찬씨 (당시 육군 참모 총장=소장·예비역 중장·현「코리아·엔지니어링」사장·56) <나는 이기붕씨가 국방장관이 되면서 차관으로 내정되어 국무회의 의결까지 받았다가 참모 총장이 되었어요. 이 장관은 정일권 참모총장이 도미 유학하게 됐으니 그 후임이 되라고 하면서 지금 세상이 들끓고 있는 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신속히 처리해야 겠으니 전력을 다하라고 해요.< p>

<육본 내 부정 관련자 징개>
생각해 보니 이 두 사건을 처리하려면 수많은 파란과 우여 곡절이 따를 것 같았지만 힘껏 해보겠다고 다짐했어요. 나는 우선 최경록 헌병 사령관을 불러 방위군 사건 관계 수사 기록을 모두 법무감실로 넘기도록 명령했어요. 이때 이 사건은 이미 한번 군재를 했는데 일사부재리 원칙의 벽을 어떻게 뚫을 수 있느냐를 법무감실에 연구시켰더니 기소 내용이나 적용법이 달라질 때는 재심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이렇게 해서 6·25 직후에 장경근 국방 차관이 만든 비상 조치령을 적용, 재심키로 하고, 고등 군법 회의를 구성했읍니다.
공평무사하게 결판을 내려 국민의 원성을 풀려는 생각에서 우선 재판부 구성에 무척 신경을 썼어요. 김윤근 피고가 준장이기 때문에 심판관의 계급도 문제였어요. 전방의 장성들은 차출할 수 없어서 후방에 있는 고급 장교 중에서 강직하고 신망 있는 분을 골랐어요. 이래서 병기감 심언봉 준장 작전 국장 이용문 준장 감찰감 안춘생 준장 군수국장 김형일 준장 계철순 법무사가 선정된 거지요. 나는 일동을 모아놓고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일체 음주를 금하고 합숙토록 지시했어요. 공판은 두번 방청했는데 김윤근 피고가 수갑을 찬 채 인사를 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픕디다.
사실 방위군 사건은 방위군 간부만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었어요. 김 피고야 솔직히 말해서 별만 달았지 직업 군인이 아니었지요.
당초 방위군 예산 편성이나 행정적인 조처가 잘 안되었다는 데서 부정의 싹은 텄어요.
그리고 국방부나 육본 당국이 그런 부정을 감시하지 못하고 방임한 것도 냉정히 따져 책임을 져야했지요. 그래서 나는 방위군 사령부에서 육본 일반 참모들에게 만들어 주었다는 순금 군번 (인식표)을 모두 회수시키고 징계 위원회에 회부, 징계했읍니다.
나는 평소의 신조가 극형 반대였는데 방위군 사건만은 숙명으로 생각하고 사형 선고문에 참모 총장으로서 확인 도장을 찍었읍니다.>
15일 동안 계속 된 공판에서는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다음은 그 한가지 예.

<전 참모 총장 증언에 분통>
▲김석원씨( 당시 전시 특명 검열관=준장·현 성남 중고교 재단 이사장·79) <나는 그때 군 내부의 알력으로 일선 지휘관에서 밀려나 한직인 특명 검열관이란 자리를 지키고 있었소이다. 방위군이 다 거지꼴이 됐다는 소문이 들어와 교육대 다섯 군데를 가보았더니 정말 그 참상이 말이 아닙디다. 마침 최경록 헌병 사령관이 찾아 왔길래 철저히 다스리라고 격려를 했고 엄상섭 서민호 의원 등 국회 특조 위원들에게도 내가 직접 본 실정을 죄다 이야기해 주었어요.
재심 군재가 개정되기 직전에 나는 김태청 수석 검찰관을 찾아가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말고 엄벌에 처하라고 격려를 했고 공판 중에는 만사 제쳐놓고 방청하러 갔지요. 어느 날 정일권 전 참모총장이 증인으로 나왔습디다. 김태청 검찰관이 다섯 가지를 물었어요. 그중 하나가 김윤근이는 1등병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별을 달고 방위군 사령관이 됐느냐는 거였어요. 정 증인은 이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이라고 대답합디다.
다섯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모두 대통령이 하랬다는 식으로 미루어 버리는 것 이었어요. 방청석에 앉아 그런소리를 들으니 울화가 치밉디다.
참모 총장이 저렇게 자기 책임을 회피하니, 뭐가 될거냐는 생각이 들어요.
나는 증언을 마치고 나가는 정일권 장군 뒤를 쫓아나갔소이다. 그리고는 『이봐, 오늘 답변이 그게 뭐야? 당장에 미장을 떼어버리라구!』고 고함을 쳤습니다. 물론 나는 너무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지요. 방청객들이 몰려나와 구경을 하고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집디다. 몇 장교들이 나와 말려서 정 장군은 아무 말도 않고 그대로「지프」를 타고 가버립디다. 이튿날 육본에서는 내가 상위 계급자에 대해 모욕을 했다고 회의를 열어 징계를 하려고 했대요. 그러나 며칠이 지나니 유야 무야되고 맙디다.
나는 사형 선고받은 자들이 죽는 것을 기어이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다고 총살 집행장에도 나갔소이다. 몇 백m 앞에 서서 5명의 피고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돌아왔지요.>
한편 구형 때의 공판은 어느 때보다도 극적이었다. 이 군재의 「하일라이트」인 구형 때의 모습을 다시 검찰관으로부터 들어보겠다.

<공판 방청 입추의 여지없어>
▲김태청 씨 (당시 육본 검찰 과장·방위군 사건 수석 검찰관=중령·전 법무감·현 변호사·54) <재판 기간을 통해 사령관과 부사령관 등은 애국자이니 처벌하지 말라는 전보를 몇 통 받았을 뿐 검찰관으로서 큰 위협은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온 국민의 보이지 않는 성원이 검찰 관측을 편달하였지요. 검찰관이 소추의 끈을 늦추거나 적당히 넘어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실 심리가 끝나고 구형 공판 날에는 여느 때보다 더 많은 방청인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이찼읍니다.
내가 논고를 할 차례가 돼서 자리에서 일어서니까 방청석은 잠깐 술렁이더니 곧 기침 소리하나 없이 숙연해지면서 모든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 같습디다. 내외 기자들은 일제히 기록할 채비를 하구요. 나는 논고의 독특한 순서에 따라 서론·사실론·증거론·법률론을 거쳐 끝으로 정상론에 들어가 대개 이런 요지의 말을 했읍니다.
『심판관제씨, 피고인 등은 지난겨울 조국 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의 불법 침략으로 제2차 후퇴라는 국가의 위기와 민족의 수난에 봉착하자 제2 국민병의 후송 교육을 위해 막대한 군수용 금품이 영달 보급됨을 기화로 군인에게 지워진 보국 위민의 거룩한 사명을 망각하고 이를 횡령 착복했읍니다.
휘하 장병들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는 그 순간에도 그들은 따뜻한 요정에서 미 기를 옆에 끼고 양주 가효로써 유흥 삼매 하였던 것이니, 이로 인하여 이름 모를 언덕에 원혼이 된 애국 장정의 수는 과연 기하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이들 장정의 부모 형제 처자 친지의 수는 또한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3천만 우리 동포 그 누구하나 직접·간접으로 이 사건 피해자 아닌 사람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현명하신 심판 관제씨,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곡성이 들립니다. 쓰러진 애국 장정의 원통한 울음소리는 하늘에 가득 차고 수많은 유가족의 비통한 울음소리는 땀을 덮는 듯 합니다. 이 실로 3천만의 곡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읍니까.
이것은 아들을 바친 어머니의 외침이요, 남편을 잃은 아내의 부르짖음입니다. 「내 귀여운 아들을 내 놓으라, 내 사랑하는 남편을 돌려다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저 피고인들의 목을 달라.」 그들은 통곡하면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맺고 나서 나는 일단 음성을 낮추어 본 검찰관은 스스로 개작하여 피고인들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한시일수를 심판관 제씨에게 바치겠다고 했어요.
「김준 미 주민 병혈 옥반가효장 정맥 항목류 시병 범류 소성 고처욕 성고」
이것은 물론 춘향전에 나오는 이도령이 암행어사로 출도 하여 학정으로 악명 높은 변사또에게 들이댄 것으로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칠언 절구를 내가 이 사건에 맞추어 적당히 변조한 거지요.

<극형은 「호유」의 응보>
피고들이 장정들에게 먹이고 입혀야 할 금품을 착복하여 호유 하다가 마침내 이처럼 처량한 모습으로 법의 심판을 받게된 것이 마치 가흠주구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생일 잔치를 하다가 암행 어사 출도로 혼비 백산하는 변사또의 모습과 흡사한 생각이 들어 논고와는 좀 거리가 있지만 그런 시구까지 인용했지요.
맨 나중에 가서 다음과 같이 구형을 했읍니다.
피고인 사령관 김윤근, 동 부사령관 윤익헌, 동 재무실장 강석한, 동 조달과장 박창원, 동 보급 과장 박기환 이상 5명 사형. 동 제10 교육 대장 송필수 징역 5년.
물론 이 구형은 사실 심리가 끝나던 날 국방장관·참모총장·법무감·검찰관 전원이 참석한 자리에서 결정한 것이었읍니다.>
◇주요일지 (1951년3월12, 13, 14일)
※3월12일 ▲중공군, 서울서 철수 개시 ▲신의주 상공서 피아의 「제트」기 42대가 대공중전 ▲이 대통령, 영월 시찰.
※3월13일 ▲적, 전전선서 후퇴 ▲「유엔」구호미 3만7천 가마 부산 입항.
※3월14일 ▲국군, 서울 완전 탈환 ▲북평 방송 동 서울 포기 시인 ▲미군 지휘관들, 중공군 총 퇴각 이유를 면밀히 검토중이라 발표.
◆정정=본연재 248회 본문 기사 중 안춘생 「대령」을 「준장」으로 바로 잡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