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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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어제 석간신문의 전송사진 한 장은 여간 심통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대만정부의 주 외교부장이 「유엔」탈퇴를 선언하고 연단을 떠나는 광경. 그 황막한 심경은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었을까. 마치 광대무변한 황무지에 혼자 버려진 듯한 느낌이었으리라.
장개석 총통은 그날 『우리는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팔아 넘길 수 있는 약소국이 아니다』라고 대성 일갈했다. 그러나 세계정치의 현실은 냉혹하다. 이제 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대만은 장차 어디로 갈거나….」-우리의 마음까지 애수롭다.
장 총통은 그의 장남(첫 부인 진결여 여사와의 아들)이자 행정원 부원장(부 수상격)인 장경국을 후계자로 묵시하고 있다. 전세기 말엽에 나서 오늘까지 파란만장의 정치역정을 겪어온 85세의 생애. 만사휴의-지금 그는 그런 심정 뿐일 것이다.
장경국은 그의 부친이 생각하기엔 「이단아」이다. 1920년대와 30년대 2차에 쳐 항일통일전선을 펐던 국·공합작 때도 장경국을 열정적인 협조자였다. 그 자신이 공산청년동맹(소련)의 일원이었으며, 37년엔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했었다. 그러나 중국혁명의 격랑 속에서 국·공은 분열하고 말았다.
그 당시 분열의 책임은 오로지 아버지인 장개석의 입신 때문이라는 「인텔리겐차」의 시국선언에 그는 감연히 서명했었다. 국·공 합작은 권력투쟁의 인과로 보면 거의 필연적인 결과였지만, 그러나 그 극적 타결이 이루어졌다면 세계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장경국 청년은 바로 그 점에 아쉬움을 품고 있었다. 장 총통이 그런 이단아를 흔쾌히 여길 리는 없었다. 부자는 상당한 세월을 「냉전」속에서 지냈다.
그러나 중·일 전쟁은 이들 부자의 해빙을 맞게 했다. 경국은 중국공산당과 결별하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왔다. 장 총통은 2년여에 걸쳐 그를 「재교육」시켰다. 그러고는 수석 보좌관으로, 국방부장으로, 지금은 부수상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의 강점이라면 「정치의 폭」을 지적할 수 있다. 청소년시절을 소련유학으로 보냈으며, 그 자신도 중국공산당에 대한 이해가 깊다. 최근 동서를 왕래하는 소련의 정치기자 「루이스」가 대만을 다녀간 것도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의 부인 바로 소련인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본토수복은 군사 전보다는 정치 전으로!』 이것이 장경국의 지론이기도 하다. 대만의 현상은 새로운 정치역학의 삼각 속에서 「스테이터스·쿼」(현상유지)를 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운명적인 결정을 강요받을 것이다. 장경국은 장차 그 운명의 「핸들」을 어떻게 움직여갈지 실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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