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표 실각 설로 굳어지는 북 평의「미스터리」1개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9월 중순께부터 일기 시작한 중공내의「모종이변」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온갖 풍설을 불러 일 으 꼈다. 추측의 중점은 중공 최고 지도층의 사망 또는 중병 설과 극좌·온건파간의 권력투쟁 등 두 갈래에 집중돼 왔다. 최근의 사태 진전으로 보아 중공의 수수께끼는 모의 후계자로 지명된 국방상 겸 당부주석 임 표에게 집약되는 것 같다. 10·1「국경 절」에 주은래가 모습을 보이고「닉슨」대통령의 특별보좌관「키신저」박사와 제2차 회담을 열게 되어 주의 신변에 큰 변함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약 2개월간 모습을 보이지 않자 사망 또는 중병 설이 떠돌던 모택동이「셀라시에」「이디오피아」황제를 영접하여 의문을 풀었다. 그러나 임 표는 10·1「국경 절」은 물론「셀라시에」황제 방문 때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 우기「루마니아」박람회 축하연에서 전통적인『모 주석과 그의 친밀한 전우 임 표 부주석 만세』라는 축배에서 임 표의 이름이 빠졌다. 15일의 최신 보도로는 임 표가「쿠데타」에 실패, 그의 심복 공군 총 참모장과 항공기로 탈출하다 몽고에서 추락사했다고 한다. 임 표가 사망했는지 중태인지 실각했는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그의 신변에 무엇이 일어나 중공의「모종이변」이 야기된 것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본사특약】거의 한달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북 평의「미스터리」는 최근 들어 약간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즉「미스터리」의 초점이 임 표의 신상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거의 확실시 된 것이다.
사실 중공정부수립 기념일인 10·1절 행사를 중지한 것은 모택동의 사망만으로는 설명되지 못한다. 모는 이미 실권을 갖지 않은지 오래이며 말하자면 정권의 후광 내지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했더라도 중공의 국내정세나 권력구조에 큰 흔들림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임 표의 경우는 얘기가 좀 달라진다. 66년이래 공공연히 모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왔고 69년 구전대회 때는 당부주석자리를 차지, 후계자로서의 발판을 완전히 굳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공지도층의 입장에서 보면 모의 사망은 숨길 이유가 없지만 임 표의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면『내부 조정 작업이 끝날 때까지』발표를 보류해야 할 형편이 된다. 북 평의「미스터리」는 이와 같은 전제하에서만 매듭이 풀려 나간다.
임 표와 주은래의 반목 설은 이미 오래된 얘기이다.
문 혁을 통해 급격한 사회주의화 작업을 이끌었던 임은 구전대회를 계기로 완전히 주를 누를 듯이 보였다.
그러나 문 혁의 거센 소용돌이가 일단 가라앉자 균형은 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여 갔다.
우선 유 소기의 수하에 있던 구 관료와 총 공 회「그룹」이 주의 그늘로 들어갔고 해방군 내부에서도 주의 지지세력이 팽 대해간 것이다.
예컨대 황영승 총 참모장은 주의 심복으로 꼽혔으며 군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이선념 부수상도 주「라인」에 끼었다. 그밖에도 많은 소장파 고급장교들이 임에게서 등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임 표의 영향력이 궤멸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다. 진백달·강 청 등 문 혁 소조「그룹」이 그대로 남아 있고 각지방의 혁명 위를 온전히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해방군 내에 있던 임의 직속 심복들은 문 혁을 통해 대거 당에 침투, 완전히 주도권을 잡고 있다. 구전대회에서 뽑은 당 중앙위원 2백79명 가운데 1백11명이 군 출신이며 지난 8월에 재조직을 완료한 지방 공 당위에서도 29명의 성 위원장 가운데 22명이 군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주도면밀한 권력구축작업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리고 후계 권을 둘러싼 두 사람의 반목은 그들의 배경과 노선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여간한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상의 결과를 가지고「미스터리」의 내용을 그 발생 순서에 따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우선 9월초에는「홍콩」의 친 중공 계 서점에서 몇 종의 유인물이 사라졌다. 구전대회에 관한「팸플릿」, 이 대회에서 발표했던 임 표의 정치보고, 임을 사살상의 후계자로 지명한 신 당헌 등이 일시에 자취를 감춘 것이다.
뒤이어 9월 11일에는 휴가장병 귀대 영이 내려졌고 모든 항공기의 발이 묶였으며 이튿날에는 몽고에서 중공여객기 한대가 추락했다.
한데 이 일련의 「조용한 파동」이 끝나자 한 가지 기묘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무슨 일에든 모택동의 이름에 이어 주은래의 이름이 나오고 이 두 사람에 대한 찬양만으로 끝나버린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공을 방문한 몇몇 외국사절단들에 의해서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중공의「미스터리」는 임의 실각 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외몽고에서 추락한 여객기 속에 임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칼을 먼저 뽑은 쪽이 임이 아니었다 하더라도「미스터리」의 설명은 임 표 실각 설로만 가능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