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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유엔」군의 총퇴각(13)|「1·4」후퇴(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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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0년 12월5일에「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후퇴를 계속하자 서울시민들은 본능적으로 부 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6·25초에 겪은 악몽이 되살아나 다시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정부나 국민은 두 가지 점에서 가냘픈 희망을 갖고 있었다. 즉「유엔」군이 북한 어느 지점에서 중공군진격을 저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유엔」에서 대두되고 있는 38선 진격 정지호소를 북 평 정권이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12월10일에 미8군사령부에서 서울사수 언질을 준 일이 없다는 미묘한 담화를 발표하고 이어 12일에 중공군이 38선을 돌파, 연안에 침입하자 모두 수도확보가 어렵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2월 하순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미군이 아예 한국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한다는 소문이 퍼져, 정부나 국민은 일종의「패니크」(공포) 상태에 빠졌다. 이 소문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으로「트루먼」행정부는 한때 그런 완전 철수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것이다. (주=본 연재 237회 참조)

<백만 명 일본 이주 계획 설도>
또한 이 때문에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일부에서는 백만 명의 일본이주계획까지 구상했던 것이다.
신임「리지웨이」장군이 27일에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미군은 한국에 머무르겠다고 다짐한 후에는 절망감은 어느 정도 사라졌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정부와 시민의 철수계획 자체에는 혼란을 가져온 것도 사실이었다. 12월 24일에 이대통령은 공식으로 시민의 피난을 명령했고 25일에는 이기붕 서울시장이 비전투원의 소개를 권고했는데「리지웨이」의 다짐을 받은 이튿날인 28일에는 시민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시장담화가 나왔다. 그런데 이보다 1주일후인 1월 3일에 정부는「리지웨이」장군으로부터 수도포기의 통고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의 급변과 엄동설한 속에서도 흔히「1·4후퇴」라고 부르는 정부와 시민소개는 6·25초의 교훈을 살려 대체로 성공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정부는 평양을 포기하던 12월 5일에는 재빨리 국립박물관 등 주요물품의 소개 영을 내렸고, 12월 8일에는 이 호 계엄부사령 관이 부녀자의 소개를 허용했고, 12월 하순에 피난이 임박해서는 수송·구호에 적극적으로 손을 썼다. 이래서 서울시민의 경우 12월30일까지는 이미 84만 명이 철수했고 1월 3일까지는 나머지 30만 명이 피난하여 1월5일에 중공군이 들어왔을 때에는 수도는 완전히 유령의 도시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정부자체도 12월 하순부터 소개를 시작하여 1월3일의 각료철수를 마지막으로 부산도청에 천도를 마쳤다.
다음은 정부와 시민들의 소개에 관한 관계자들의 증언.
▲김덕보씨(당시 총무처장 비서·현 동양방송 사장·54) <나는 12월24일에 총무처 직원 5명을 데리고, 정부 각 부처의 중요문서와 물자를 부산으로 소개하는 책임을 맡았어요. 용산 역에서 특별화물차 두간에 짐을 가득 싣고- 그러니까 꽤 많은 수량이지요 떠났는데 1월3일에야 부산 초 량 역에 도착했어요.
그만큼 철도가 붐빈 거예요. 그 길로「트럭」으로 소개 짐을 도청으로 운반했는데 짐 속에 더러 개인 보따리가 끼어 있어요. 고의적으로 그런 게 아니고 실을 때 섞인 것으로 주인을 못 찾고 도청 창고 속에 그대로 넣었어요.

<장관들은 마지막 비행기로>
이날 바로 각 장관들이 마지막 비행기편으로 서울을 떠나 부산 천도가 끝난 겁니다.
6·25초에 하도 혼들이 나서 정부도 1·4후퇴 때에는 12월 하순부터 단계적으로 천도를 서두른 게 사실입니다. 모든 공무원들에게 봉급을 한 달치 씩 선불해서 가족소개에 쓰도록 하고, 사무관 급 이하의 불 급한 하급공무원들은 자기 고향에 가서 대기하도록 했고요. 그래서 1·4후퇴 때는 거의 모든 공무원들이 피난할 수 있었습니다.
총무처의 경우 잔류한 직원은 6·25전에 국회「푸락치」사건에 관련됐던 모 인사와 교분이 있던 모 과장 이외는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공무원가족 소개도 각 부처 형편에 따라 미리 주선을 해 비교적 잘 진행됐어요.
다만 6·25초 때 경험 때문에 가족들이 지정해 준 수송 편을 기다리지 않고 아무거나 차량만 있으면 집어타고 남하해서 부산서 한동안 가족 찾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우리 가족도 그런 경우입니다만….
제1차 천도 때는 모두 야간도주하다시피 해서 중앙행정력이 완전히 마비됐었지만 2차 때에는 후퇴 즉시 정부나 국회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1백20여 만의 서울시민과 북한에서 남하한 50만, 그리고 남한 각지의 50만 등 도합 2백 20여 만의 피난민을 소개 구호하는 데 있어서는 사회부(현 보사부)및 교통부관계자들의 노고가 많았다. 다음은 그 관계자들의 이야기.
▲허 정씨(당시 사회부장관·전 과정수반·75) <나는 11월23일에 이윤영씨 후임으로 사회부장관에 취임했는데 이때 벌써 전세가 심상치 않았어요. 정부나 피난민 철수계획을 짜야겠다고 결심한 것은「유엔」이 평양을 포기했을 때오.< p>

<학교마다 난민수용 구호 나서>
군사전략은 잘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평양·원산 요부에서 중공군을 저지하지 못하면 서울은 지키기 힘들지 않아요. 미군이 서울을 사수하려고 한강 이북에다 배수의 진을 칠 리는 만무하고. 12월20일이 되니까, 벌써 춘천에 적이 침투해서 가 평 쪽의 피난민이 서울에 밀려들기 시작하더군. 이보다 며칠 전에 나는 조병옥 내무와 김석관 교통 등과 함께 피난민소개구호계획을 미리 짜 놨었어요. 그 계획을 그대로 발동했소이다. 가 평 쪽 피난민을 서울로 못 들어오게 마 석에 수용소를 마련하고 광주로 해서 남하하도록 안내했어요. 광주와 수원간의 학교마다 피난민수용소를 설치하고 피난민에게 급식과 숙소를 제공하고는 자꾸 남으로 보냈지. 더 큰 문제는 서울시민철수인데 12월중순부터 부녀자와 노인들은 빨리 피난 가라는 포고문을 써 붙였어요.
다리도 동 빙고·마포·한강에 세 개의 부교를 마련했고 공무원들도 하급직원과 공문서·중요기재 같은 것은 미리미리 다리를 건너게 했지요. 요는 6·25초의 비극이 큰 교훈이 돼서 1·4후퇴는 성공한 셈이지요. 나는 1월3일에 김포서 군용기로 부산으로 철수했소이다.>
▲신순우씨(당시 서울역장·현 국회교체 위 전문위원·62)<그때 서울역에는 5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어요. 폭격으로 역사무실이 파괴되어 화차간을 대용하여 침실 겸 식당으로도 사용했지요.
철도수송관계는 형식적으로 철도국과 미군이 공공으로 주관했지만 주로 미군이 지휘했어요. 서울역에도 위관을 책임자로 하는 미군 RTO관계자 20명이 파견돼 있었습니다. 1·4후퇴 때는 자연히 철도는 군관용과 피난민수송의 세 갈래로 사용해야 했는데 미비한 기재와 적은 인원으로 고생이 막심했지요. 기록을 보면 도합 3천3백 량의 객차로 병력을 후송했고, 3만2천8백 량의 화차로 20여 만t의 군수품을 소개했어요. 12부 4처의 정부소개도 대부분 철도를 이용했고요. 그리고 전국의 피난민은 50년 12월10일부터 51년 1월25일까지 7천여 량에 1백26만7천 명을 수송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뚜렷한 것은 마지막 피난열차예요.

<1월4일엔 2만7천 명 수송>
1월4일에 20량 정도의 화차로 9회에 걸쳐 2만7천여 명의 피난민을 수송했습니다. 객차나 화차출발은 일정한 시간이 없고 기관차나 차량이 마련되는 대로 운행했어요. 화차는 덮개는 있었으나 난방장치가 없어 피난민들이 오돌오돌 떨던 것을 잊을 수가 없군요. 이날 내가 탄 마지막차가 서울역을 떠난 것이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한강철교가 아직 복구되지 않아 지금 철교에서 하류로 좀 내려간 여울에 목 교를 가설하고 그 위에 철로를 깔았어요. 마지막 차가 서울을 떠날 때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는데 안양쯤 내려가니까 피난민들이 마구 몰려 화차지붕까지도 발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달라붙었어요.>

<주요일지>(1951년 2월10·11·12일)
※2월 10일 ▲김포에 미군 공정 대 투하▲영등포완전탈환▲인천시청에도 태극기▲중공군, 서울방어는 북괴군에 맡기고 철수
※2월 11일 ▲수도사단 38선 재돌파코 양양 탈환 ▲미일간의 대일 강화조약예비회담완료▲소련, 장 춘 철도와 여순 항을 중공에 반환
※2월 12일 ▲미8군대변인, 양양 탈환 국군부대 원위치로 귀환했다고 언명 ▲적, 중부전선서 맹 반격, 국군 제3과 제8사단에 타격▲적, 영등포에 포격▲「애틀리」영 수상,「유엔」군의 38선 재 돌파는 신중을 기해야한다고 언명
※알림=「민족의 제언」문의나 연락전화는 (28)8211 (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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