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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제20화>전문학교(6)-김효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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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초창기의 보·연전>
보전은 설립당시 전임교수가 없이 강사로만 출발했다. 『각 전문과 담임강사는 외국에 유학하여 전문과를 졸업한 자로 한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로 보면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을 알 수 있겠다.
초대 교장에는 신해영, 교감은 조재환, 학감 정안립·박승혁, 강사 석진형·장수·유문환·신우선·이면자·홍재정·전치형·장지식(이상 법률 담당), 원응상·전승겸(이상 경제담 당)등 임원을 포함하여 14명으로 출발했다.
신해영은 초대교장으로 재임하다가 1907년4월 재일 한국유학생 감독으로 파견되었으며 1년 뒤 다시 선전교장으로 재임된 덕망과 재질이 겸비한 우국지사였다.
그는 교장으로 있으면서 법률야간부를 신설했고 이재학과를 경제학과로 고쳐 야간부로 바꾸었다.
수업 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한 것도 신 교장이었다.
보전 제1회 졸업생 52명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 계신 분은 거의 없으며 법률 주간부의 윤재선·허헌이 발군의 존재였다.
윤재선은 모교의 교장으로 10여년 동안 봉직했고,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신문사 사장직을 겸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의 실태와 의의를 널리 보도 선전한 애국자였다.
허헌은 3·1운동 당시 33인의 변호인으로서 공소불수리를 제기한 날카로운 변호사였고 뒤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및 모교의 교장 등으로 민족의 권익옹호와 교육활동에 많은 공적이 있었으나 해방 후 자진 월북했다.
보전 제1회 졸업식 광경을 보도한 기사를 원고 그대로 실어본다. 『졸업식의 광경이야말로 진귀하였다. 고령을 물론하고 우리의 손으로 된 최고학부니 만큼 두문불출하던 학자들도 도포에 관을 쓰고 여덟팔자 걸음으로 정각이 되기 전부터 운집하였다.
졸업생도 천태만상, 어떤 학생은 갓을 쓰고 어떤 학생은 머리를 발 뒤까지 치렁치렁하게 땋아 내리기도 하고 또 어떤 학생은 운두리가 넓은 사포(모자)를 쓴 학생도 있었다. 교복이라고는 물론 없었으나 졸업식 날은 일제히 도포에 마른신을 신었다.
제 1회 졸업식! 이 얼마나 기쁜 일이랴. 그러나 이 졸업식을 누구보다도 기다리던 이용익은 그 때는 벌써 국내에 있지 아니하였다….』(신동아지)
이용익은 노일전쟁 후 고종으로부터 불란서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도록 하라는 밀령을 받고 보전 설립직 후인 1905년 9월 해외로 나갔으나 성공치 못했다.
해외에서 조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는 비보를 들은 이용익은 더욱 낙담한 나머지 병을 얻어 1907년 1월 「러시아」의 해삼위에서 양자 현재의 임종 아래 54세를 일기로 외로이 객사했다.
그가 죽을 때 고종에게 올린 진소에는 『학교를 널리 세워 인재를 교육하여 이것으로 국권을 회복하소서』라는 단 한마디가 적혀있어 그가 교육의 중요성을 얼마나 절실히 느끼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이 말은 만세에 전할 금언으로 남아있다.
연전이 YMCA에서 새 교사로 옮긴 뒤 미국인들로부터의 기부금이 답지함에 따라 「스팀손·홀」 「아펜셀러·홀」 「언더우드·홀」등 설립 유공자나 기부자의 이름을 붙인 건물이 완성되어 기초가 확고해 졌다.
학과는 문학과·신학과·농학과·상과·수학 및 물리학과·응용화학과로 나뉘었는데 모집 정원은 상과만 30명이고 나머지 학과는 20명이었다.
신학과와 응용학과는 실제로 개강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가 이 같은 학과에 대한 인식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원자가 없었던 결과였다.
수업연한은 문학과·수학 및 물리학과·신학과가 4년, 다른 학과는 3년이었다.
초창기에는 교원채용에 있어 반드시 기독교 성서를 신봉하는 자만이 교수로 임명되며 비교인은 최고의 대우가 강사였다.
1918년의 교직원 명단을 보면 교장 「에비슨」, 부교장 「빌링스」, 학감 「A·L·베커」를 제외한 교수 8명중 미국인 4명, 일본인이 3명이며, 한국인은 백상규 뿐이었고 그밖에 조교수 1명과 강사 3명이 있었다.
학생은 반드시 기독교 신자임을 요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신자가 과반수였다.
다수의 기독교인으로 소수의 비 기독교인을 포섭 내지 동화시키는 것이 연전의 근본 교육방침이었다.
1919년에 배출된 제1회 졸업생은 문학과 8명, 상학과 10명, 수학 및 물리학과 4명등 22명이었다.
이 가운데 상과를 나온 김원벽은 3·1운동 당시 전국학생의 지도자로서 이름이 높았고 수물과를 졸업한 이원길은 졸업 후 도미 유학을 한 뒤 귀국 즉시 모교 교수로 오랫동안 근무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의 고초를 겪기도 했다.
유명한 천문학자인 그는 해방 후 모교교수, 인화공대학장, 기상대장 등으로 활약하다 몇 해전 작고했다. <계속><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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