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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미국 대사의 실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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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남정호
중앙SUNDAY 국제선임기자

2010년 말,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장기전략을 담은 ‘4개년 외교·개발 정책보고서’를 내며 중대선언을 한다. 외교의 ABC를 바꾸겠단 결의였다. 그가 미 외교관에게 던진 메시지는 간결했다. “세계를 ‘스마트 파워 (smart power)’로 돌리라”는 거였다. 스마트 파워가 뭔가. 총·칼이나 돈 대신 신뢰와 호감으로 상대방을 움직이는 힘이다. 그래서 나온 게 그 유명한 ‘카고 팬츠(건빵 바지)론’이었다. 그는 “주재국 외교관은 물론 시골 부족 어른들도 만나야 하며 줄무늬 양복뿐 아니라 카고 팬츠를 입고 뛰어라”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지역민들과의 만남, 언론 인터뷰, 봉사활동, 소규모 지역행사 참여 등 활발한 민간교류는 미 외교관의 의무”라고 못박았다. 요즘 한창 뜨는, 민간 중심의 ‘공공외교’를 잘 하란 소리였다.

 이런 방침을 캐슬린 스티븐스 전 미 대사만큼 완벽하고 즐겁게 수행한 이도 없다. ‘심은경’으로 불리는 스티븐스 대사는 구수한 한국말을 구사하며 삼천리를 누볐다. 대학생들과 자전거로 남도를 달렸으며 제주도 올레길, 무등산 옛길을 걸었다. 경복궁 민속행사장에 가선 참가자들과 덩실덩실 춤췄다. 광주 한 여고를 찾아가 ‘여성의 역할’ 특강도 했다. 압권은 한국-그리스 간 월드컵 예선전 때였다.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거리응원이 한창인 서울광장에 나타났다. 그런 모습은 늘 크게 보도됐고 한국인의 가슴을 적셨다.

 스티븐스 대사의 후임이 지금의 성 김 대사다. 2011년 11월 초 부임했으니 딱 2년이다. 첫 한국계 대사가 온다는 소식에 한국인들은 감격하고 환호했다. 한국말이 통하고, 이 땅의 정서를 전임 누구보다 잘 알 걸로 믿었기에 한·미 간 튼튼한 다리가 될 걸로 기대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그가 잘 안 보인다.

 일을 안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얼굴을 내미는 곳이 미 상공회의소 행사, 한국전 정전 기념식, 외교부 청사 등이다. 일반인이 얼씬하기 어려운, 공식석상을 맴도는 느낌이다.

 요즘 한·미 간 분위기가 부쩍 썰렁해졌다. 미 정보기관이 한국 대통령과 워싱턴 대사관을 도청한 게 틀림없다. 한국인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집단적 자위권을 추진하는 일본 손을 대놓고 들어주지 않나, 별 득 없어 보이는 미사일방어체제(MD),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가입하라고 한국을 압박한다. 노무현 정권 이후 좋아진 한·미 간 기상도가 쾌청에서 흐림으로 빠르게 변했다. 이런 때일수록 미 대사가 동분서주하며 이 땅의 보통사람들 마음을 달래줘야 하는 게 아닐까.

 억울할 순 있다. 자신이 소극적인 게 아니라 전임자가 너무 특별했다고. 조용필 다음에 마이크 잡은 건 맞다. 혹자는 말한다. “한국계라 더더욱 몸조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김 대사에 대한 미 국무부 내 평가는 후한 편”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하나 고개 들어 서해 너머를 보면 그런 말도 변명처럼 들린다. 

 공교롭게 김 대사 부임 세 달 전 중국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중국 이민자 후손인 게리 로크 전 상무장관이 사상 첫 중국계 대사로 발령 난 거다. 다르다면 로크 대사는 13억 중국인들이 열광하는 스타 중의 스타로 사랑받고 있단 점이다. 스타벅스에서 할인쿠폰을 쓰고, 공항에서 직접 짐을 챙기는 로크 대사의 소탈함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면서 영웅이 됐다. 특권의식에 쩐 중국 고위관리들과 대비됐던 거다. 

 지극히 당연한, 검소하고 실질적인 공직자의 모습에 중국만큼 열광할 한국은 아니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가 미국 이미지 개선에 큰 몫을 한다는 사실이다. 최근엔 중국 정부의 허가 아래 독립운동이 격렬한 티베트를 방문, 인권 수호자란 명성까지 챙겼다.

 겸손과 소극은 다르다. 뚜렷한 인상 없이 그저 밋밋한 대사로 남기엔 그의 존재가 한국인에겐 너무 각별하다. 남의 나라 대사에게 뭘 바라느냐 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첫 한국계 미 대사이기에, 그래서 훗날 또 다른 이 땅의 아들딸이 외국의 고위직 후보에 오를 때 그가 선례가 될 가능성이 높기에 바람이 큰 거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남은 임기만이라도 막걸리를 앞에 두고 한국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남정호 중앙SUNDAY 국제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