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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때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 … 정부수립 전 행위도 현 정부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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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미국 군정 시절에 국가기관이 저지른 잘못도 현 정부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

 대구지법 제11민사부(부장판사 이영숙)는 김모씨 등 ‘대구 10월 사건’ 사망 희생자 5명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3명의 유족들에게 총 4억78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고 3일 밝혔다. 구체적인 배상 내역은 희생자 1인당 8000만원, 그 배우자에게 4000만원, 부모·자녀에게 각 800만원, 형제·자매는 400만원씩이다. 나머지 희생자 2명의 유족에 대해서는 “사건 당시 경찰에 의해 살해됐다고 볼 증거가 부족하다”며 청구를 기각했다. 대구 10월 사건은 미 군정 때인 1946년 일어났다. 군정의 양곡정책에 반발해 시위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경찰이 총살하는 등 100명 안팎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그간 경북 문경 양민학살(49년)이나 경남 거창 양민학살(51년)처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일어난 사건을 놓고 배상 판결이 내려진 적은 있으나 정부 수립 전의 사안에 대해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소송과 관련해 국가 변호인 측은 재판에서 “미 군정 때 일어난 일을 현 정부가 책임질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48년 8월 11일 체결된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 미국점령군대 철수에 관한 협정’ 등에 ‘대한민국 대통령은 과도기 정부 때 발생한 지휘 책임을 인수하는 것에 동의한다’는 조항이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 수립 후 미 군정의 모든 것을 이양받았기 때문에 배상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또 “총격을 가한 경찰은 여전히 현재도 같은 기구가 국가기관으로 존속하고 있는 만큼 현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족들은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현지 조사를 거쳐 대구 10월 사건 민간인 피해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자 지난해 7월 소송을 냈다. 집단소송 전문가인 백영기(54) 변호사는 “사건 당시 사망자가 많은 만큼 이번 판결을 계기로 추가 소송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구=김윤호 기자

◆대구 10월 사건=1946년 미 군정은 식량난을 해결한다며 농촌의 쌀을 강제로 징수하는 ‘미곡 수집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헐값에 사들이는 것이어서 농민들의 불만이 컸다. 경찰은 쌀을 거두려 집을 뒤졌고, 이에 항의해 그해 10월 1일 7500여 명의 주민이 대구역 등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곧 전국으로 번졌다. 경찰이 시위대에 직접 발포하거나 주동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구·경북에서만 1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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