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유엔」군의 총퇴각>(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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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 정수민간인 3명만 지명>
2차 대전 때 영 군의「던커크」철수를 방불케 한 흥남 철수 작전에서 10만2천명의 전투요원이 고스란히 빠져 나왔다. 12개 사단의 중공군중력을 받으며 많은 병력과 장비를 큰 피해 없이「적전철수」에 성공한 것은 미10군단 참모 진들의 치밀한 작전계획과 아울러 미 해·공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흥남 철수 작전의 또 하나의 특색은 전투병력과 거의 동수의 피란 민이 해로로 철수했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흥남 항으로부터는 9만8천명이, 그리고 성진 항으로부터는 1만2천명의 북한 피란 민이 각각 배를 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10여만의 비전투원들은 마지막 순간에 가서 겨우 배편이 마련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유원직씨(당시 한국군 제1군단 민사처장=중령·예비역육군대령·전 최고위원·현 사업·54) <12월18일「유엔」군의 철수문제를 논의할 때 미10군단장「네드·아먼드」장군이 나를 부릅디다. 장군은 흥남서 곧 철수할텐데 한국민간인으로는 함남지사인 이귀하씨, 강윤숙 여사의 숙부인 강학복씨, 그리고 어느 목사 한 분을 지명하면서 이 세 사람만 데리고 가라고 해요. 나는 아연실색했어요. 모두가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겠다는 데 세 사람 만이라니, 말이 됩니까?
나는 적어도 10만명은 데리고 가야한다고 했더니「아먼드」장군은 깜짝 놀라면서 지금 군인과 장비도 제대로 철수하기가 어려운데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는 거예요. 결론을 못 내린 채 옥신각신하다가 나와 버렸어요. 군단본부에 와서 김백일(고)군단장에 보고했더니 즉시 참모회의를 열었어요. 김백일 장군을 비롯한 각 참모들도 피란 민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데리고 가야 한다고 주장합디다.
김 장군은 미군 측이 영영 말을 안 들으면 우리국군 제1군단은 피란 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자고 해요. 모두 그 주장에 동의했읍니다. 이 회의를 마치고 나니까 미10군단 헌병이 나를 데리러 와서 다시「아먼드」장군을 만났어요. 그는 피란 민은 3천명만 데리고 가라면서 그 이상은 한 명도 안 된다고 잘라 말합디다.

<가족 데리러 가는 길에 적 만나>
나는 우리군단 참모회의에서 피란 민과 함께 육로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말했어요. 「아먼드」장군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내 「노·노」만 연발해서 그냥 나와 버렸어요. 좀 있으니 참모장이 허겁지겁 나에게 와서「아먼드」장군이 또 오라는 거예요. 장군은 최종적인 양해라면서 군인과 장비를 싣고 남은 공간에는 피란 민을 태우라고 합디다. 이렇게 해서 각 군용 선박과 징발한 민간목선을 최대한으로 이용, 10만명의 피난민을 수송했습니다. 조그만 목선에는 너무 많이 타서 도중에 가라앉기도 했어요.
▲송요두씨(당시 수도사단장=준장·전 내각수반·현 인천제철사장·54)<미제10군단장 「아먼드」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처음에 피란민 수송에 아주 냉담했어요. 김백일 군단장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난민은 데리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만약 우리가 이들을 버리고 가느니보다는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게 낫다고 주장했어요. 어차피 괴뢰들 손에 죽을 테니까요. 최후적으로 우리국군은 육로로 후퇴 할 테니 우리를 수용할 선박에 피란 민을 태워달라고 간청하기도 했어요.>
▲박진수씨(당시 수배하의 함남도기건설과 근무·현 아주 공건 기술담당 상무·50)<12월15일께부터「유엔」군의 철수이야기가 설왕설래하고 민간인들이 술렁대기 시작했어요. 12월22일에 함흥시의 도청에 출근하니까 전직원을 집합시키고 즉시 흥남으로 내려가라는 거예요. 가족이나 친지한테 한마디 이야기할 사이도 없이 흥남으로 내려갔어요. 부둣가에서 생각하니, 아무래도 가족을 두고 혼자 떠날 수가 없어 다시 함흥으로 발길을 돌렸어요.
그러나 도중에서 중공군과 북괴군을 만나 달음박질을 해서 다시 흥남으로 내려왔어요. 나는 겨우 맨 마지막 피란민 수송선에 올라탔읍니다.

<흥남은 순식간에 불바다>
우리가 탄 마지막 배가 떠나니까 아직도 남아있던 많은 피란 민이 아우성을 치며 더러는 바다에 투신자살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배 위에서 그 참경을 보고 모두 흐느껴 울었습니다. 우리배가 항구를 빠져 나오자 미군의 함포 사격이 시작됩디다. 순식간에 흥남 시내는 불바다가 돼버리고 수많은 피란 민이 몰려있던 부둣가도 검은 연기에 휩싸이데요.
12월 24일에 부산에 도착했다가 이튿날 다시 우리는 거제도 피난민수용소로 가서 6개월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나왔읍니다.>
▲현호채씨(당시LST 온양호 실습항해사·현 여수항도선사·49)<그때 우리는 민간인으로 6·25에 참여했기 때문에 군복에「징」자 휘장을 달고 다녔는데 세번째 흥남에 입항했을 때 우리 배 앞에 피란민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이 밀어닥쳐 갑자기 후퇴명령이 내렸다는 거예요.
인간의 목숨이 그렇게 소중하면서도 천한 것인 줄은 이때 알았읍니다. 2천7백t밖에 안 되는 온양호에 1만4천여명을 실었는데 사람 위에 사람을 포개어 앉을 정도여서 콩나물시루 이상이었죠. 그래도 흥남 부두 쪽에서는 배를 타지 못한 피난민들이 새까맣게 몰려 아우성을 치고 울부짖었는데 LST선수쪽 문을 닫을 때는 미처 배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피난민이 문 사이에 끼여 허덕이다가 바다위로 떨어지기도 했어요.
지금은 누구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어떤 목사가 가족들을 내동댕이치고 혼자서 우리 배에 승선 할 정도로 그때의 형편이 위급했습니다. 우리 배가 흥남부두에서 이날하오 5시깨 출항, 3마일쯤 항해하자 벌써 흥남 시내에서 작전이 벌어져 시가가 불바다가 됐는데 그때 철수 선을 타지 못하고 부둣가에서 아우성치던 그 많은 피란 민들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포개 앉다시피 만7천명 승선>
그리고 남쪽으로 선수를 돌려 항해 중 묵호 항에 잠깐 들렀다가 4일만에 거제도 장승 포에 닿았는데, 이때 숭선 인원을 점검해본 결과 흥남 부두서 1만4천여명이던 것이 1만7천여명으로 늘어났어요.
항해 중 배에서 밥을 지어 피란 민에게 주었는데 나누어 줄 방법이 없어 주먹밥을 피란 민 머리 위에다 마구 던져주었어요.
아뭏든 장승 포까지 항해하는 동안 피란 민이 배 안에서 6명의 새아기를 분만했고, 24명이 얼어죽고, 7명이 미쳐버렸으니까 그때 이야기는 이것만 가지고도 실감이 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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