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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비극과 실향민의 망향|김치수<문학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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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인훈씨의 『서유기』(을유문화사 간)는 그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들의 시화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가 지금까지 제기하였던 문제, 또 지식인으로서 고민하였던 문제, 그의 작품이 도달할 수 있었던 수준을 이야기하고 있다. 『광장』이래 몇 편의 중·장편과 여러 편의 단편에서 그는 기술상의 새로운 시도를 곁들여왔다. 『회색인』의 속편으로 쓰여진 이 작품에서 그는 여러 가지 기술의 방법론을 동원하고 있다.
그가 단편으로 발표했던 것들이 이 작품 속에서 그 문맥을 찾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 작품에서 두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그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작품의「모티브」가 무엇인지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상상의 세계에서 춘원과 이순신과 논개와 춘원의 주인공들을 만난다.
그러한 만남을 통해서 그는 현실에 대한 역사적 인식에 도달하고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사고 나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는 오늘날 지식인이 상황에 대해 정당하게 반응을 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지식인의 가장 큰 고민으로 파악하고 있는 그의 문학은 그러므로 남-북 분단의 현실을 가장 비극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현실이 역사적 과오의 순환으로 드러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의「모티브」가 「향수」에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그것은 남-북 분단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의 그것으로서 으로 그는 표시하고 있다. 『두만강』『회색인』에서 보여 주었던 향수가 이 작품에서도 배경음악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독고준이 W시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향수가 하나의 감상으로 떨어지지 않고 작품의 중요한「모티브」가 되는 것은 그것이「실향민」의 존재론적 장 황으로 승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단에 대한 감상적 인식이 아니라 논리적 인식을 의미하며, 현실에 대한 관념적 인식이 아니라 관념의 논리화인 것이다. 한 작가가 그 시대를 올바로 파악하고 괴로워하는 것이 이 작품에서만큼 잘 드러내는 경우도 드물 것 같다.
분단에 대한 이야기는 오영수 씨의『새』(현대문학)에서도 발견하게 된다. 이남에 있는 조류학자가 이북에 있는 아버지의 소식을 <새>를 통해서 알게되는 이 작품에서 그는 분단이 가지고있는 민족의 비극을 느끼게 한다. 작품 자 채로 서 가지고 있는 결함-감상적 고백이라든가 사실자체에 너무 한정되어 버렸다든 가 하는-때문에 설득력이 반감되기는 했지만, 그의 이야기 가운데 새로운 것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새로운 이야기가 좋은 작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조해일 씨의『통일 절 소묘』 (월간중앙)는 분단된 이 땅이 통일된 뒤 통일 절의 하루를 가상해서 쓴 작품이다. 서울·평양·부산·원산·신의주를 문자그대로 소묘하고있는 이 작품에서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은 답답한 현실에 청량 감을 주고자 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이 가져오는 것은 통속적인 재미에 지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가 사소한 것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중요한 문제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이다.
최근에『리빠똥 장군』연작을 발표하고 있는 김용성 씨의『바드레』(현대문학)는 무당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마을을, 여인을 겁탈하려 했던 목사가 그 보상을 받고자 무당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그는 <바드레>를 하나의 닫힌 사회로 파악하고 있고, 목사의 도전을 외래문학의 도전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문화변동에 관한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한 것으로서『리빠똥 장군』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을 통해서 사회나 문화전반에 걸친 인식으로 가려는 그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공간이 확대되고 심화되면 그의 문학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게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호철씨의『사월과 빙원』(을유문화사간)에서『퇴역선임하사』도 마찬가지다. 씨는 이 작품에서 정당하게 살아가려는 표면적 의지를 가지고있는 주인공이 비굴하게 살게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개인은 풍속의 일면을 충분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풍속이『사월과 빙원』에서는 너무 의도적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설득력을 잃고 있다.
최근『소문의 벽』을 통해서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개인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바 있는 이청준씨는『문단속 좀 해주세요』(현대문학), 『목포행』(월간중앙)을 통해서 작가가 왜 소설을 쓰지 못하는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진실을 진술하였을 때 올바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험에서 나온 것임을 씨는 말한다. <소문>으로 살고 죽는 육촌형을 통해서 씨는 육촌형 자신은 없고 소문만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하고, 정당하게 대결하려 했을 때는 상대편이 긴장을 풀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전쟁과 악기』이래로 그가 제시한 세계의 구체적인 탐구이고 자기성찰인 것이다.
작품을 연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조율만 하는 음악가, 소설을 쓰지 못하고 말로만 소설을 쓰는 작가, 그들은 곧 현실에 진실은 남아있지 않고 소문만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며, 진실을 이야기하면 믿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것은『소문의 벽』의 <전 짓 불>이 상징하고있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인식이며, 씨가 계속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은 지식인의「알리바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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