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내 첫 야구장 여성 아나운서 모연희씨 50년 전 그날처럼 "1번 타자 중견수 …"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3면

모연희씨가 28일 잠실구장에서 한국시리즈 4차전에 출전하는 양팀 1번 타자를 소개하고 있다. [김진경 기자]

삼성-두산의 2013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이 열린 28일 서울 잠실구장에 특별한 시구자가 나섰다. 1960년대 한국 최초의 야구장 여성 아나운서로 활약한 모연희(73)씨였다. 마운드에 오른 그는 차분하게 자기 소개를 한 뒤 50년 전 어느 날처럼 양팀 1번 타자를 소개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삼성 라이온즈 1번 타자 중견수 배영섭, 두산 베어스 1번 타자 중견수 이종욱.”

 반 백년 세월이 흘렀지만 낭랑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선수들의 이름을 또박또박 읊자 관중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어 문승훈 주심으로부터 건네받은 공을 힘껏 던졌다. 작고 동그란 포물선이 푸른 잔디 위에 그려졌다.

 “1963년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렸던 한·일전에서도 아나운싱을 했는걸요. 시구는 긴장됐습니다. 온 힘을 다해 던졌습니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59학번인 모씨는 1960년부터 6년간 동대문야구장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금녀의 구역이었던 야구장에 나타난 첫 여성 아나운서였다.

 “여자가 무슨 야구를 아느냐는 말은 제게 통하지 않았어요. 원로 야구인이셨던 아버지(고 모무열씨) 덕에 야구규칙을 꿰고 있었거든요.”

 중앙일보는 지난달 27일 모씨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66년 결혼한 뒤 평범한 가정을 꾸렸던 그의 삶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여러 방송 매체와 올드 야구 팬, 대학 후배들이 그를 찾았다. 1960년대 실업팀 한일은행 1루수로 활약했던 김응용(72) 한화 감독과는 뒤늦게 연락이 닿아 안부도 확인했다.

 “결혼 후 약사인 남편과 함께 약국 일을 하면서 지냈어요. 기사가 나간 뒤 당시 TBC 프로듀서였던 분이 팬이었다며 연락을 해오셨어요. 예전에 한 야구 팬이 산통 중인 아내를 병원에 두고 야구를 보러 왔어요.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제가 ‘관중석에 계신 OO씨. 얼른 병원으로 가 보세요. 좋은 소식입니다’라고 장내 방송을 했거든요. 그걸 모두 기억하시더라고요.”

 시구를 마친 모씨는 그 옛날 야구장 마이크를 잡았을 때처럼 꽃다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12월에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을 갑니다. 한국 땅에 머물 시간도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네요. 세월 속에 잊혀진 저를 찾아주시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글=서지영 기자
사진=김진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