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지관식 예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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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백인이 19세기에 「아프리카」와 인도를 지배할 수 있던 것은 무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에 그들이 열대지방의 더위를 견딜 수 없었다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세우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20년전에 일본인이 더위를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를 연구한 학자들이 있었다.
그 결과 2시간 견딜 수 있는 더위는 섭씨 40도에 습도 70%, 45도에는 습도 50%가 한도였다.
비슷한 조건에서는 한국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의 경우는 이 정도면 얼마든지 안전하게 견딜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내열의 능력은 영양상태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단백질과 지방의 섭취 량이 증가한 이제 와서는 일본인이나 우리나 모두 더위와 습도를 이기는 힘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우리가 장마를 생리적으로 잘 견딜 수 있게된 것도 이런데 까닭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전엔 장마철만 되면 사람들은 거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종로의 상인들은 장마가 끝날 때까지 거의 울상이었다. 이제는 장마가 돼도 사람들의 일상생활에는 아무 탈이 없다. 그만큼 근대화의 혜택을 본다고 할까. 그러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게 있다. 홍수 뒤의 얘기들이다.
1971년 7월18일자 아침 신문을 펼쳐본다. 그리고 이보다 3, 4십년 전 어느 여름의 장마 뒤 신문을 대조해 본다. 똑같이 산사태가 있고, 4, 5십명씩의 사망자가 있고, 경부본선이 끊기고, 단수·정전이 있고, 도심지의 침수사태가 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숱한 「근대화」가 있었을텐데도 말이다. 더욱 딱한 것은 광화문의 지하도가 물에 잠겼다는 사실이다.
지하도가 생겼을 때 당장에 서울이 세계적 도시로 발돋움이라도 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었다. 그게 이제는 그저 시궁창에 뒹군 근대화의 상징 같게만 보인다. 몇 해 뒤의 지하철도 같은 꼴이 되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상예보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중앙관상대에서는 17일 새벽 3시까지도 약간의 소나기가 내릴 것이고, 강우량도 30mm를 넘지 않을 것이라고 예보했었다. 실제 강우량이 1백mm를 넘어서야 뒤늦게 호우주의보를 냈다. 관상대란 장기예보를 위해 있다. 무슨 까닭에선지 장기예보를 못한다면 단기예보라도 정확해야할 것이다.
일본의 작가 국지관이 기자 초년병일 때 관상대를 들르지도 않고 자기 신발을 굴려 앞이냐 뒤냐로 일기를 점쳐서 기사를 썼다는 일화가 있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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