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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에 영향 준 「타고르」|김용직 교수의 비교 분석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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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의 현대시는 만해 한용운의 출현을 기다려 비로소 그 속에 깊이를 지니는 미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한용운의 시의 원동력의 일부가 된 것이 바로 「타고르」였다고 한국 문학자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김용직 교수 (서울대 교양과정부) 는 『한국 현대시에 미친 「라빈드라나드·타고르」의 영향』 (아세아 연구 41호)에서 이 같은 주장을 펴면서 「타고르」의 수입 경로로부터 한용운 시의 「타고르」시와의 비교 분석에 이르는 여러 면을 살폈다.
동양인으로서는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며 암담했던 식민지 시대에 「동방의 등불」이라고 우리를 불러준 인도 시인 「타고르」가 극동에 소개된 것은 1915년 이후였다.
19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 중국에서는 1915년 10월 『신 청년』 제1권 제2기에서 그의 시가 진독수에 의해 번역 소개되었고 일본에서는 같은 해 역시집 『기탄자리』가 증야삼량에 의해 출판되었다.
한국에서는 1917년 『청춘』 11호에서 진학문에 의해 『기탄자리』『원정』『신월』중 각 1편의 시와 「쫓긴이의 노래」가 소개됨으로써 비롯했다고 진은 「타고르」가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16년에 「청춘」을 주재하던 육당 최남선의 요청으로 「타고르」와 만나고 「타고르」의 문학과 인물을 소개하는 글을 보내왔으며, 이것이 다음해 11월에 발포됐던 것이다.
진학문의 다음으로 「타고르」를 소개한 것은 한용운이었다. 1918년9월 그는 잡지 『유심』을 창간, 『사다나』 (생의 실현)의 일부를 소개했다.
이어 20년7월 『학생계』창간호에 오천석은 희곡 『우편국』을 역재 했고 그는 「창조」7호와 8호에 『기탄자리』18편까지를 번역, 소개하였다.
안서 김억이 「타고르」에 손댄 것은 이 다음이었다. 구미 상징시의 소개자였던 그는 22년7월 『개벽』2주년 기념호에서 『원정』 9편을 소개했다. 이에 이어 23년 그는 평양에서 『기탄자리』를 완역 상재 했고 24년에는 『신월』『원정』을 번역 발간했다. 이 밖에 『청년』『폐허이후』등에도 번역시를 발표, 두햇 동안에 2백50편의 「타고르」시를 소개한 열성을 보였다. 이 무렵 그는 논문체의 글로서도 「타고르」를 이론적으로 소개했다.
이와 함께 『금성』동인들의 「타고르」소개도 주목된다. 23년 『금성』창간호에서부터『신월』이 양주동·백기만에 의해 소개되었다.
25년을 고비로 「타고르」수입은 격감 일로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한국시에 미친 「타고르」의 영향은 이광수에서부터 흐리나마 나타나고 있다. 이광수의 수상·논문들 가령 「자기초월」에 나타난 대아주의, 「옛 조선인의 근본 도덕」에 나타난 「우리」주의, 기다림과 기구를 읊은 것에서 「타고르」의 작품을 상상케 하는 것이다.
오천석의 시작 특히 『나는 거름이 되리라』는 「타고르」의 요소가 있다. 그가 「타고르」의 소개자였던 만큼 그 영향을 받았다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자연에 대해 찬미를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영향을 받았을만한 사람 가운데 김억이 「타고르」의 영향권 밖에 있은 것은 주목된다. 그는 처음에는 형태상 즐겨 자유시의 형식을 썼고 내용 면에서 「프랑스」중심의 상징파 및 「데카당스」파의 영향을 보였으며 후기에는 격조 시라는 정형시에 몰두했다.
이에 비해 오히려 소월에 있어서는 「타고르」 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소월은 「진달래꽃」「먼후일」「못잊어」「금잔디」 등에서 일상적인 「님」(임)을 노래했지만 「꿈자리」에서는 감상적 처우나 세속을 넘어선 초월자적 존재의 「님」을 얘기한다.
이것은 『기탄자리』의 「님」과 일치하는 영역이다. 이면에서 김 교수는 『소월이 그 스승 김억 보다도 빛나는 국면을 개척한 제자임이 증명된다』고 말했다.
백기만의 『은행 나무 그늘』이 「타고르」의 영향을 받았다면 같은 『금성』 동인 양주동은 그렇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에 이르러서는 「타고르」의 영향은 결정적이다. 26년에 나온 『님의 침묵』은 모두 90편의 작품을 수록했는데 『전면에서 곧 직선적인 「타고르」와의 연결 가능성을 느낄 수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기탄자리』로 대표되는 「타고르」시가 그 본질에서 님에게 드리는 시이듯 만해의 님 자체가 「님만 님이 아니라 기른 것은 다 님이다」라는 서문 말처럼 다분히 『우파니샤드』의 투영이다.
만해와 「타고르」는 거의 동일한 성격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시적 상관물도 두 사람에 있어서 거의 일치점을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대비는 만해의 『가지 마셔요』와 「타고르」의 「원정」, 『알 수 없어요』와 「원정」, 『예술가』와 「원정」, 『자유정조』와 「심판관」, 『나의 노래』와 「나의 노래」, 『복종』과 「심판관」, 『어데라도』와 「마즈막」, 「채과집」④, 『나의 꿈』과 「마지막」, 「삼백 꽃」, 『오서요』와 「원정」⑫등에서 보인다.
형식·내용 면에서 볼 때 『알 수 없어요』와 「원정」을 대비하면 함축미를 살리는 세심한 용의의 자취에서 볼 때 만해는 「타고르」를 능가하고 있다는 평이다.
시의 형태·발상 근거 「이미지」제시 수법·구문 형식 등 여러 면에서 「타고르」는 만해에 영향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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