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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제14화><무역…8·15전후>(1)전택보<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필자약력 ▲1901년생 ▲일본 신호고상졸 ▲전 대성목재대표 취제역 ▲전 조선일보사 대표 취제역 ▲전 과도정부 상공부장관 ▲주식회사 천우사 대표 이사 ▲주한 「덴마크」 명예총영사 ▲서울중앙YMCA 이사장 ▲SRI 한국위원회 위원장 ▲한국 보세가공품 수출협회장▲한·정 협회장

<근대무역 시작>
사가들은 보통 우리 나라에서 근대무역이 처음 시작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나서부터라고 한다.
비록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긴 했지만 이 한일무역조약을 계기로 부산·원산·인천 등의 관문이 차례로 개방되었으며 뒤이어 청국과 미·영·독·노·불 등 서구제국과의 수호조약도 체결케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 이전에는 고작해야 압록·두만강을 넘나들면서 물물을 교환하는 국경무역 뿐이었던 것이 바다를 건너 항구와 항구를 잇는 해상무역으로 그 범위가 넓어지고 동시에 서구의 각종 공업제품이 물밀듯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사람들이 근대무역에 눈을 뜨고 직접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다. 개항후의 무역은 모두 일본인 아니면 화상 혹은 소수의 서구상인들 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한국상인들은 그들에게 수출품을 수집해 주고 수입물자를 사서 팔았을 뿐이었다.
내 나이 지금 70. 내가 일본 신호고상을 나와 금융기관을 전전하다가 무역업을 시작한 것이 37세 되던 해인 1938년이니까 그 이전의 무역동향은 나중에 들어서 아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리 나라 사람으로 근대무역에 제일먼저 발을 내디딘 사람은 구한 말 「배오개」(지금의 서울 종로 4, 5가 일대)에서 포목점을 하고있던 당대의 거상 박승직씨(작고·박두병 대한상의 회장부친)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을사보호조약과 함께 국운이 기울어져 가던 1905년 박승직씨를 중심으로 한 최인성·김원식·최경서씨 등 포목상인 30여명과 당시 일본「오오사까」의 거상으로 이름 있던 「이또오쮸」와 가까웠던 일본상인 「니시하라」가 공동 출자하여 「합명회사 공익사」를 설립했는데 이 공익사야 말로 우리나라사람이 처음으로 세운 무역회사인 동시에 한일합작회사였다.
사장에 박씨가 앉고 「니시하라」는 전무가 되었다. 남대문로 3가의 한일은행 본점과 국립도서관사이에 있는 설경동씨 계의 대한산업건물이 바로 공익사가 개정할 때부터 쓰던 「빌딩」으로서 지금도 붉은 벽돌 2층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있다.
공익 사를 설립한 경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많다. 당시 서울의 직물상들은 인천항을 거쳐 들어오는 외국직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영국에서 직접 오거나 또는 상해를 경유해서 오는 영국직물이 인기가 높아지면서 인천에 있는 영상과 화상들이 직물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그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제의 자금과 특히 우리보다 밝은 근대무역기술을 이용하여 직물을 직접 수입함으로써 영상과 화상들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런가하면 한일합병을 앞두고 일본이 한국경제에 침투하려는 속셈의 일단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속셈은 제각기 달랐을는지 모르겠지만 이해관계가 일치해서 설립을 본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공익 사는 수출용 화물수송에서 총독부의 철도운임 할인 혜택을 받는 등 영향력이 대단했다.
그것은 「니시하라」라는 사람의 수완과 이 회사가 설립 초부터 지니고 있던 특수성 때문이었다. 「니시하라」는 상인이기 보다 오히려 정치인에 가까운 거물로 총독부 안에서는 물론 일본 정계에서까지도 영향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합방직전 당시 일본의 재정 고문으로 왔던 「메가다」(목하전), 뒤에 총독부 이재과장으로 있다가 북경정부재정고문을 지낸 「후지하라」(등원) 등이 모두 「니시하라」의 수족이었다.
합방이 되자 「이또오쭈」는 정식으로 공익사에 참여했으며 1914년에는 「이또오쭈」가 50만원을 추가 불입함과 동시에 주식회사로 개편되고 그 해 일본과 만주의 봉천· 장춘· 안동·「하르빈」 등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만주지점들은 일본의 직물을 만주에 수출하고 그곳 곡물을 일본으로 가져갈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1919년에는 만주공익사로 개편, 떨어져 나갔다.
조선공익사의 주주구성은 「이또오쭈」가 3분의 1로 절대적이고 박승직씨는 20분의 1에 불과했으나 그는 1938년 전시통제경제가 실시될 때까지 줄곧 사장으로 있었다.
일본 상품을 소화하고 필요한 식량과 기타 기초원료를 수입해가려면 역시 탄탄한 재력과 방대한 유통망을 가진 한국상인을 활용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박승직씨는 공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1918년 우리나라상인들로 경성포목상조합을 결성, 조합장을 맡았으며 이듬해에는 일본 상인들 중심의 경성상공회의소에 맞서 경성 상공협회를 구성, 회장직을 맡는 등 실업계의 거물로 군림했었다.
1940년 강제 해산 당하기까지 인사동 「파고다」공원 뒤에 사무실을 두고있던 상공협회에는 주로 직물상을 하던 최인성 김희준(공익사 취체역이던 김원식씨 아들) 최남 허택 신덕현씨 등 당시 장안의 거상들과 백화점의 박흥식씨 등이 회원이었는데 1년에 두 번, 봄가을에 장충공원에서 열리곤 했던 협회주최 한국 실업 인들의 「대운동회」는 장안의 명물이었다던 얘기가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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