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현직 외교관 한국 망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에티오피아 소재 북한 무역대표부 외교관이 지난 8월 한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24일 확인됐다. 정보당국 관계자는 “북한 외교관 1명이 두 달 전쯤 망명을 신청한 뒤 현재 한국에 들어와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외교관의 직급과 가족 동반 여부 등 구체적 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무역대표부 대표 등 최고위급 인사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남북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문제로 제안과 역제안을 하고 있을 때 들어와서 당국이 조용히 처리를 하곤 사건이 묻혀 있는 상태로 안다”고 전했다.

 정부가 남북 해빙 무드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해 망명 신청한 북한 외교관을 극비리에 한국으로 데려와 비밀에 부쳤다는 뜻이다.

 북한 외교관이 망명한 지난 8월은 냉각됐던 남북관계에 해빙 분위기가 흐르면서 개성공단 정상화가 합의되고, 우리 측의 이산가족 상봉 제안과 북한의 금강산 관광 재개가 이뤄지기 직전이다. 북한은 2009년 10월 에티오피아 북한대사관 직원 김모(43·의사)씨가 한국에 망명 신청을 하자 자국 대사관 차량을 한국대사관 앞에 도열시키고 위협하는 등 강력하게 반발했었다.

 망명 외교관은 현재 정보당국의 보호를 받으며 관계당국의 합동 신문을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보당국은 이번 외교관 망명이 대북제재 국면에서 북한이 외교관들에게 외화벌이 부담을 가중시킨 데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북한 외교관들은 외교행낭을 통해 벌크 캐시(bulk cash·다량의 현금)나 사치품·마약 등을 북한으로 유입시키는 통로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난 3월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안 2094호를 채택하며 북한 외교관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외교관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다는 설명이다.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는 “대북제재로 해외 일꾼에게 요구되는 외화벌이 할당량이 높아지며 엘리트층까지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해외 파견 외교관 자녀들에 대한 귀국 명령을 내린 것도 에티오피아의 북한 외교관 망명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북한은 해외 공관에 9월 말까지 동반 자녀 1명을 제외하고 모두 귀국하도록 지시를 내렸다가 9월 말을 전후해 철회했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당시 “북한이 유학파들이 귀국 후 비판세력이 되거나 해외로 망명하는 일을 우려해 귀국 지시를 내렸다”고 분석하며 “북한 당국이 지시를 번복한 건 많은 대상자(외교관)가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정부는 민감한 정보를 다루는 북한 외교관의 신변안전을 위해 제한적으로만 망명 사실을 공개하고 있다. 현재까지 공개된 북한 외교관 망명자 중 최고위급은 2000년 10월 주 태국 북한대사관 과학참사관(1급)으로 근무하다 가족 3명과 함께 망명한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이다.

정원엽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