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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제자는 필자>|<제13화>방송 50년(11)|이덕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리말의 수난>
처음 일본말로 된 방송국을 세웠다가 1933년에 소위 이중 방송이라 하여 우리말 방송을 따로 둔 것은 한국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불편을 덜기 위해서였다.
이중 방송이 생길 당시에 조선 일보는 기사에서『방송순서를 일본인 측과 조선인 측을 섞어서 하기 때문에 쌍방의 청취자가 모두 불편했다』고 보도해 이것을 반영했다.
이렇게 하여 생긴 제2방송은 경성 방송국 뿐 아니라 1936년에 생긴 평양 방송국도 1936년11월에 이중 방송을 실시했고 청진·함흥·이리 방송국 등 지방 국이 이에 따랐다.
평양 방송국은 JBBK로 불렀는데 모 단대와 대동강을 한눈에 보는 오야 리에 자리 잡고 제1, 제2 연주실을 갖추어 규모가 꽤 컸다.
1937년l2월 소위 중일 사변이 터지면서 우리말 방송은 고난을 겪기 시작했다.
34년에 김정진 제2방송 과장은 권덕규씨를 강사로 조선어 강좌 시간을 편성했었다. 이 「프로」는 그때로서는 파격적으로「텍스트」까지 발행해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나 37년에 일본어 강좌에 대치되어 없어졌다.
제3대 과장인 심우섭씨는 취임하자 정확한 우리말의 사용에 역점을 두어 방송 때마다 아나운서들의 발음을 고쳐주는 등 열의를 보였다. 특히 자 고저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는데 예를 들면 고기압의 발음이 일본말로「고오기아쓰」인데 아나운서들이 이 영향을 받아「고오기압」이라고 발음하는 따위였다.
33년에 생긴 제2방송은 37년까지 4년 동안 그런 대로 태평 시대를 누렸으나 중일 사변이 나면서 그때까지 연예 위주로 편성되었던「프로」가 전시 동원 체제로 바뀌어 전쟁 수행 수단으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방송국은 일본의 동맹 통신을 받아보고 있었는데 1938년에 접어들면서 총독부 안에 정보 위원회가 생겨 여기에서 모든 뉴스를 관장, 이른바「시국 인식」에 도움되는 뉴스만을 방송하도록 통제해 버렸다. 이해에 한국 청년들에 대한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어 많은 청년들을 훈련소로 데려갔는데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해 불편이 커지자 이해부터 소위 우리말을 말살하기 위한 일본어 상용 운동이 명령된 것이다.
방송국에 이 명령을 내린 것은 1939년 체신국 감 리 과장 명의의 공문 한강이었다.
제2방송과로서는 날벼락이었다. 이때부터 한국인 아나운서들의 한-일 두 나라 말로 된「범벅방송」이 시작된 것이다. 이「범벅방송」이란 고유 명사를 우리말로 읽은 뒤 일본말로 다시 한번 발음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오늘 조선 총독부,「죠오셍소오도꾸후」는-』하는 식이었다. 이것이 실시되자 방송국에 오래 근무한 한국인 직원들은 고통을 받았다. 박충근씨 같은 이는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아 쩔쩔매고 방송국에 갓 들어온 사람들이 수월하게 해냈다.
이제부터 일본말을 잘하는 사람이 출세(?)를 하는 판이었다. 어떤 사람은 일본의「나니와부시」를 국역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아나운서는 크게 한국말을 일본말로 옮기는 한-일어 사전과 같은 것이 꼭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송진근 등 아나운서들이 자작 사전 만들기의 일을 해 나갔는데 설상가상으로 총독부는 그때까지 시중 판매하던 문세영씨의 조선어 사전을 판매 금지시키는 바람에 우리말 사전마저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때 마침 편성을 보던 김억이 출판 회사인 영창서 관 주인과 친분이 있어 간신히 사전 한 권을 입수하여 이를 보배처럼 아끼면서 돌려보곤 했는데 손때가 묻고 헐어서 1945년 해방될 때는 이 한 권의 사전은 앞 뒷장은 다 떨어져 나가고 중간만 약간 남아 있을 정도였다.
조선어 강좌 대신 l937년부터 시작된 일본어 강좌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어 방송이 그나마 수년동안 명맥을 유지한 것은 1939년에 총독부가 밝힌 입장 때문이었다. 즉 반도 대중의 대부분은 아직도 충분히 일어를 해독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문화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본말을 다 알아 제1방송을 들을 수 있으니 제2방송의 뉴스와 해설은 무식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하라고 했다가 그나마 범벅 방송을 시킨것이였다.
이 명령을 받을 때 제2방송 과장은 심우섭씨였다. 공문이 오던 날 심 과장은『방송은 종전대로 하라』고 한국인 아나운서들에게 이르고 방을 나갔다.
그 길로 심 과장은 체신 국의 감 리 과장에게 가서『일본말을 섞어서 하는 방송은 못하겠소』하고 쏘아붙이고 나왔다는 일화를 남겨 기개를 과시했다. 그러나 심 과장의 용기는 시류에는 어쩔 수 없었고 얼마 후 방송을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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