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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25」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월경 논쟁(하)|38선 돌파와 북진(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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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8선 돌파를 둘러싼 워싱턴과 동경 사이의 논쟁은 앞서의 인천 상륙 논쟁 못지 않게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워싱턴은 인천 상륙 논쟁에서 결과적으로 맥아더 원수에게 KO패 했음에도 불구하고 38선 월경에 대해 중대한 제한과 조건을 붙였다.
맥아더가 한국 전쟁에서 임의로 단행한 「이북 포 폭격」같은 몇 가지 「독단전행」을 이번에는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고삐를 죄었다. 그러나 38선 돌파 논쟁도 인천 상륙과 마찬가지로 맥아더는 끈질긴 요구와 설득으로 결국은 인천 상륙 논쟁에서 얻은 바와 같은 KO승은 못 되지만 판정승 정도는 워싱턴으로부터 쟁취했다.

<맥아더, 수차 본국 의사 타진>
9월27일에 미 합참 본부로부터 새 훈령을 받은 맥아더 원수는 『북괴군이 본인이 발하려는 항복 권고에 응하지 않을 경우, 본인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38선을 넘어도 좋다는 권한을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미 국방 장관에게 타전했다. 이틀후인 9월29일에「조지·C·마셜」국방장관으로부터 『개인적인 견해지만 38 이북에서의 작전은 전략·전술적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진행해도 좋다고 생각한다』는 회답이 왔다. 그후 다시 워싱턴으로부터 트루먼 대통령도 그 점을 승인했다는 전보가 왔다.
이로써 「맥아더」원수는 38선 돌파시기에 대해서 재량권을 갖게 됐지만, 여러 제한 조치가 해제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다시 9월30일에 『북괴군이 항복할 때까지 우리 유엔군은 한반도 전역에서 작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결의를 워싱턴에 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회답은 없었다. 역시 워싱턴의 의중은 소련·중공의 개입 징조가 있으면 북진해서는 안되며 국경 지대에는 한국군 이외의 유엔군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문제를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마셜 국방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본인은 귀관으로부터 반대의 훈령을 받지 않은 한, 10월2일 자정에 유엔군 부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반 명령을 하달하고 이를 전세계에 공표 할 생각이다. 6월27일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에 따라 유엔군에 허용된 군사 행동의 범위는 한반도 전역에 이르고 있다. 소위 38선이라는 것은 우리의 군사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다.
적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서는 가령 그것이 정찰 행동이든 국지적 전과를 확대하는 경우이든 간에 유엔군은 자유롭게 38선을 넘어도 좋다.
만약 북괴군이 내가 10월1일에 권고할 항복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유엔군은 그 지닌바 임무와 작전상의 필요에 따라 적의 무장 집단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한 이를 색출 공격하여 분쇄한다.』
이에 대한 워싱턴 측의 회전은 어처구니없게도 책임을 회피하는 내용이었다.

<중공 움직임 세계서 주목>
『이 문제를 더 공표 하거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귀관은 필요에 따라 작전을 계속하라. 본국 정부는 38선을 논쟁의 대상으로 삼기를 바라지 않는다.』말하자면 이 문제를 이상 더 거론치 말고 재량껏 다루라는 것이었다.
여하간 맥아더 원수는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본국 정부의 의향을 확인했으나 시원한 확답을 듣지 못한 채 이 중대 문제를 홀로 외롭게 처리해야 했다. 맥아더 원수는 예정대로 10월1일에 『북괴군은 즉시 무기를 버리고 전투 행위를 중지할 것을 권고한다』고 방송했다. 전면 항복을 요구한 것이나 평양 측은 예상대로 이를 묵살했다.
한편 트루먼 행정부가 38선 돌파에 있어 가장 염려한 중공의 개입 여부에 대해서는 추측이 구구했다. 중국 대륙을 제패하고 정권을 수립한지 불과 1년도 채 못 되는 중공의 움직임은 세계의 수수께끼였다. 「죽의 장막」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북평 정권이 한국 전쟁 때 대해서 전혀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아니며 때때로 의미 심장한 의사를 표명하곤 했다. 즉 8월20일에 주은래 수상은 「트리그브·리」(노르웨이 대표) 유엔 사무총장과 말리크(소련 대표) 안보 이사회 의장에게 『한국 전쟁은 미국의 「침략」으로서 중국인민은 한국 문제 해결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타전했다.
다시 8월24일에는 미군기의 영공 침범에 항의하여 안보 이사회에 『미군기의 중국 영토에 대한 직접 무력 공격』이라고 타전하는 한편 『미 제7함대의 대만 해협으로부터의 철수』를 요구하고 8월28일 다시 미군기의 침범을 보도하면서 29일에 『미국은 악의를 가지고 무력 침략을 확대하려고 한다』고 비난, 안보 이사회에 『미국의 이런 행위를 유죄라고 판결하고 또한 미 「침략군」을 한국으로부터 즉시 철수하도록 권고하라』고 제의하였다.

<중공군 이동 개입으로 안 봐>
중공 정권은 27일 3대의 B-29를 포함한 10대의 미군 기가 안동 비행장과 철도를 폭격했다고 항의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8월27일에 「머스탱」전투기 2대가 일기 불순으로 안동을 오사한 사실을 인정하고 정중히 사과했다.
8월27일에는 미 육군성에서 중공군 2개 사단이 한만 국경으로 이동하고 안동에서는 선박을 징용하고 북한의 중공업 시설을 만주로 옮기고 있다고 발표했으나 중공군이 북한으로 진주할 것 같지는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을 전후해서 중공의 움직임은 점차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기울어 졌다. 9월11일에 향항의 서방 소식통은 중공군 90만이 한만 국경으로 이동 중이라는 주목할만한 정보를 전해왔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유엔군이 영등포에 돌입한 9월23일에 중공은 갑자기 『조국의 위기를 구하려고 만주에 있는 팔로군 출신 조선 의용군이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발표하고 『중공인민은 항상 조선 민족 편에서 싸울 것을 분명히 해둔다』고 성명 했다. 그리고 9월25일에 신화사 통신은 『미군 기가 안동 비행장에 폭탄 12개를 투하했다』고 보도하고 또한 이날 중공군 참모 총장 대리 최영진 대장은 북평 주재 인도 대사 「K·M·파니커」에게 『중공은 미군의 38선 돌파를 묵인할 수 없다』고 미국에 대한 경고를 전했는데 이 경고는 유엔군 주력이 38선에 도달한 9월31일에야 공표 됐다.
중공의 본격적인 경고는 맥아더 원수가 바로 북괴군의 전면 항복을 요구한 10월1일에 나타났다. 이날은 중공 정권 수립 1주년 기념일로서 주은래가 기념사를 통해 미국에 대해 중대한 경고를 발했다. 즉 그는 『중공의 가장 위험한 적은 「미 제국주의자」로서 중공의 이웃 우방이 파괴되는 것을 좌시 하지 않겠다』고 연설했다. 주는 이날 다른 집회에서도 『중공인민은 평화를 사랑하지만 평화 수호를 위해서 침략자와의 일전을 불사치 않겠다』고 소리치기도 했다.

<임표의 18개 사단 집결 몰라>
주은래의 이와 같은 경고는 누가 보더라도 중공의 한국전 개입을 표명한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워싱턴이나 동경에서는 주의 경고는 유엔군을 38선에 묶어두려는 공갈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중공은 건국 1년 밖에 안된데다가 아직 대만과 티베트 문제를 해결치 못하고 있으며 중공군 장비는 빈약하기 때문에 감히 미군에 달려들지 못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만약 이때에 임표휘 하의 중공 제4야전군 18개 사단이 압록강변에 집결해 있는 사실을 알았거나 또는 중공이 보다 더 구체적으로 개입 의사를 표명했더라면 한국 전쟁의 방향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한편 유엔에서도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뒷받침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서방측은 안보 이사회의에서 소련 거부권 행사 때문에 총회에다 38선 돌파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영·호·브라질·쿠바·네덜란드·노르웨이·파키스탄·필리핀의 8개국 공동 결의안을 제출했다. 제안 설명에 나선 비율빈의 「로물로」대표는 유엔군의 38선 돌파의 권한은 이 공동 결의안의 채택을 기다릴 것 없이 이미 6월27일의 안보 이사회 결의로써 인정됐다고 북진을 기정 사실로 취급했다.

<북진 추인한 유엔의 가결>
10월7일까지 9일간 총회에서 이 결의안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으나 결국 45대5 기권 8로 가결됐다. 이 때는 이미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고 노도와 같이 적도에 쇄도할 무렵이었다. 유엔에서의 정치적 결정에 앞서 이미 군사적인 단안은 내린 뒤로서 또 한번 유엔은 미국 결정을 추인 하는 셈이 되었다고 유엔 총회에서 8개국 결의안이 채택된 후인 10월9일에 맥아더 원수는 워싱턴으로부터 미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훈령을 받았다. 『중공이 공식으로나 비공식으로나 간에 대부대로 한국전에 개입할 경우에 귀관은 귀관 판단에 따라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단 중공 영토에 대한 작전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모호한 훈령이었다. 요는 중공 개입 여부는 모르지만 개입하더라도 유엔군은 즉시 후퇴하지 말고 성공의 공산이 있거든 쳐부숴도 좋다고 해석할 수 있는 지시였다. 한가지 뚜렷한 사실은 소련·중공 개입 위협이 있다면 북진하지 말라는 종전의 훈령에 비해 「진일보」해서 맥아더 주장에 약간 접근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날 맥아더 원수는 두 번째로 북괴군에 항복을 권고했으나 이를 김일성이 거부하자 미 제8군과 10군단에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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