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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제13화>방송 50년(3)|이덕근<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생방송의 희비>
처음 방송이 시작됐을 때는 「콜·사인」을 부르는 소리가 독특했다.
마치 지금 각 역에서 열차의 발·착을 알리는 소리처럼 『제이-오우-디-케이』라고 길게 뽑았다. 그리고는 『고찌라와 게이죠 호오소오 교꾸데스』하고 여기는 경성 방송국이라는 것을 일본말로 방송했었다.
이와 같은 이른바 한·일 두 나라 말의 혼합 단일방송은 1933년까지 5년 동안 계속되었다.
물론 이 기간에도 약20%정도의 우리말방송이 삽입되어 국악회 양악·고담 춘향가·강연등이 있었지만 그 내용이나 방송기술은 보잘것없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아나운서」란 말도 없었다. 방송국을 경영하는 일인들은 「아나운서」를 방송원이라 불렀고, 그 대우는 서기 급이었다. 그러나 수당이 붙어서 월급은 45원에서 60원까지 받았다고 이옥경 여사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자와 「아나운서」의 직종이 생기지 않았고 방송국경영도 독점관료사업이어서 방송의 시간관념이 희박했다. 이옥경「아나운서」는 한번은 방송도중 원고지 1장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원고가 없으니, 꾸며댈 도리가 없어서 방송을 하다 말고 『잠깐 기다리세요』라고 방송을 잠시 중단, 자기책상에 돌아와 원고 한장을 찾아 갖고 가서 다시 『오래 기다리셨읍니다』 하고는 방송을 계속했다는 정도로 허술했다. 이런 일은 흔했다.
초창기 때는 이 같은 실수가 애교였고,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생방송이라는 데서 빚어졌다. 어려운 점이 많았지만, 특히 효과를 내기가 힘들었다.
방송이 개국한 첫해, 그러니까 1927년 12월31일이다. 방송국에서는 1928년의 새벽을 어떻게 하면 감격적으로 청취자에게 알려주느냐를 고심하다 첫닭 울음소리를 보내기로 작정, 수탉을 방송국「스튜디오」안에 가져다 놓고 울기를 기다려 멋진(?) 계오방송으로 했었다.
같은 해의 일이지만, 제야의 종소리를 보내기 위해 서울 저동에 있던 일본인들의 절인 본원사에서 종을 빌어 「스튜디오」앞에 가져다 놓고 울려 효과를 거둔 것까지는 좋았으나 당장 종을 쳐야 할 본원사 측에는 종이 없어 치지 못해 난리를 치렀다.
또 한번은 1928년 봄으로 생각되는데, 효과로 풀벌레우는 소리를 내려고 여치 등 풀벌레를 잡아 왔지만, 끝내 울지 않아 침묵만 흐르다가 실패한 일도 있었다.
그래도 효과적인 방송을 해보겠다는 의욕이 왕성해 1929년 몸에 꾀꼬리 6마리를 「스튜디오」에서 울게 하여 간신히 두 번 모기소리 같은 꾀꼬리 소리로 방송했지만, 청취자들의 놀림편지가 쇄도하는 바람에 이 의욕은 꺾여져 다음부터는 아예 그만두고 축음기로 대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실수 말고 「아나운서」의 실패도 속출했다.
방송국의 「스튜디오」는 2층에 있었다. 「아나운서」는 방송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지휘실에 들어가 전화로 송신기실과 『지금부터 방송합니다』고 연락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 연락이 되면 송신기 「스위치」가 켜지고 이어 방송「마이크」를 조작하게 되는데 가끔 순서가 잘못되어 법석을 떨기도 했고, 이 사고가 나면 방송과와 기술과는 각각 과장 앞에 불려가서 경위조사를 철저히 받아야 했다.
기구가 이렇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나운서」의 군소리 등이 많이 방송되었다.
한번은 방모「아나운서」가 명월관 기생으로 이름 있던 신해중월씨의 소리반생 사회를 맡았었다.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신해중월씨가 방송시간을 기다리고있었다. 방모「아나운서」는 명월관 단골로 신씨를 잘 아는 사이였다.
「라이트」가 ON에 켜져 있어 「방송 중」임이었으나 방씨는 깜박 잊어버리고 『신해중월이, 신해중월이 하다가 신해중월씨하고 부르자니 내 신세 딱하구나』고 한탄 비슷, 농을 걸었는데 그만 이 말이 방송돼 버렸다. 스스로 망신을 세상에 알린 셈이 된 것이었다.
이때 방송국의 가장 활발한 장기는 신문보다 빠른 주식시장과 기미였다.
방송과에는 2대의 직통전화가 있었는데 하나는 증권거래소, 하나는 인천의 기상관측소와 연결돼있었다.
인천에서 기상통보를 받을 때는 일본어로 받았다. 일본인 「아나운서」가 이를 방송하는 것을 보고 한국인 「아나운서」는 눈으로 번역, 입으로 다른 마이크에 대고 방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인 아나운서의 발음에 끌려 들어가기가 쉬었다. 일본말로 『아메가 훗다리 얀다리 시마스』(비가 오거나 그치거나 하겠읍니다)하고 방송하면 우리말로 번역해 나가다가 『일기가 흐렸다리 개었다리 하겠읍니다』하여 우스운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잘못은 애교일수도 있지만, 뒤에서 이야기할 1940년대에 가서는 우리말 말살운동이 벌어져 수난이 겹치게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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