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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168)-제자는 필자|<제12화>조선 은행(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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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조선 은행은 만주 중앙 은행과 만주 흥업 은행이 설립되자 만주에서의 주요 중앙 은행 업무와 대부분의 지점·출장소 등을 이들 은행에 이양한 후 조선 은행 본래의 업무 영역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미 식은계 은행 (저축 은행·한은·금융 조합 등)의 조직 기반이 굳어진 뒤였기 때문에 조선 은행을 중심으로 한 단일 금융 체계의 확립이 어려웠고 중앙 은행으로서의 통제력이 여타 은행들에 미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조선 은행은 일본의 산금 정책의 대행 기관으로서 자금 지원 역할도 많았다. 27년의 이른바 「금준비평가법」에 따라 정화 준비 4백50만원 분을 일본 은행에 약취 당한 뒤 일본 은행권을 이에 대충했다. 그때는 금본 위제여서 조선 은행권의 발행은 일정 율의 금이나 일본 은행권 정화 준비를 필요로 했다. 일본은 금준비평가법에 따라 증권의 1원대 금 750mg을, 1원대 금 290mg으로 평가 절하하여 금을 빼앗아 갔다. 이와 함께 일본은 조선 은행의 보증 준비 발행 한도 (정화 준비 외의 추가 발행 한도)를 5천 만원에서 1억 원으로 늘려 이후의 통화 증발에 따른 인플레이션 유발의 근원을 이루었다.
34년에 입행한 박숙희씨 (현 한비 사장)는 첫 부임지가 대구 지점이었다.
그때 대구에는 22년에 입행한 권영중씨 (뒤에 한은 대구 지점장·현 한일 은행 전신 흥업 은행 상무 역임)가 먼저 와 있어서 두 주호들이 자주 어울렸다. 권씨가 10년쯤 연상이었지만 술자리에서는 의기 투합한 바가 많았었다. 집안이 비교적 유족해서 술값을 자주 부담했던 박숙희씨는 술자리에서 취중의 권씨가 깨무는 바람에 생긴 오른손 엄지손가락의 큰 흉터를 아직도 갖고 있어 요즘도 두분이 만나면 그때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권영중씨는 대부계·서무계·계산계 등 각계를 고루 맡아보아서인지 은행 업무 전반에 매우 밝아 지점장의 신임이 두터웠다.
대부계는 예나 지금이나 은행에서 중요한 포스트이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잘 맡기지 않았으며 특히 일제 말기에는 전시 금융 취급 때문에 더욱 그랬었다. 대구 지점의 한국인 거래선은 경북청도에서 삼공물산이라는 큰 정미소를 갖고 있던 고 이영희씨를 비롯, 조선 양조장을 하던 박노익씨 (국회의원 박준규씨 선친) 가 가끔 거래했고 대구에서 삼성 상회 (제분 및 제면)등을 경영하던 이병철씨 (현 삼성「그룹」회장)도 어음 할인을 해가던 기억이 난다.
해방 2년쯤 전에 본점에서 권영중씨를 지배인 대리로 승진시켜 해주 지점으로 전임시키려했으나 그때는 전쟁중이라 권씨가 부인의 태중임을 핑계로 이를 거절, 다시 박숙희씨를 그 자리에 보내려했으나 공교롭게도 박씨 부인도 태중이라 같은 핑계를 대고 모면했던 것 같다.
나중에는 결국 본점에 있던 김유택씨 (한은 2대 총재)가 해주 지배인 대리로 부임했는데 해방 후 월남 때 고생이 많았다.
41년께 내가 업무 검사 차 대구에 내려갔을 때 그분들과 용두방천으로 야유회를 갔었는데 마침 휴일이라 기차가 만원이어서 석탄 기관차에 매달려가다 터널 속에서 연기에 질식할 뻔했던 생각도 난다.
8·15해방 직후 권영중씨는 대구 지점장, 박숙희씨는 대전 지점장이 되었고, 1950년 한국 은행법이 통과된 뒤 상호 은행 (이전의 한국 무진으로 조선 은행 조사 부장을 지낸 박재욱씨가 전무, 김유택씨가 상무로 있었다)과 구 조선 은행 지점망을 통합한 한국 상공 은행이 발족하면서 박씨는 영업부 지배인 겸 상무, 권씨는 부산 주재 상무로 같이 자리를 옮겼다.
상공 은행은 뒤에 신탁 은행과 통합, 흥업 은행 (현 한일은행 전신)으로 발족했다.
34년에 입행한 백두진씨 (현 국무총리) 는 진남포 지점에 오래 있다가 본점 영업부 대리로 승진된 뒤 업무부 행원으로 전보되었다. 당시 업무부는 차장·대리 등 중간 책임자가 없고 과원 제도에서 은행 업무가 훨씬 능률적이었다. 뒤에 백두진씨는 목포 지점 대리로 갔다가 43년인가 문상철씨 (현 조흥 은행장)와 함께 광주 지점을 개설했다.
부임 이후 해방될 때까지 줄곧 청진 지점에서만 근무해온 장기영씨 (현 한국일보 사장) 는 대부주임이 된 후에 일인 지점장이 아예 도장까지 맡기고 골프 치러갈 만큼 신임이 두터웠다.
청진·회령·웅기지점 등은 후에 한국인에게도 30%에 가까운 벽지 수당이 지급되기도 했다. <계속> 【안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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