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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제12화 조선은행(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금융계 불황>
식산 은행의 대우가 좋다는 세평에 따라 한국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했지만, 조선은행의 한국인대우도 좋아졌다.
구용서씨가 동경 고상을 나와 조선은행 동경지점에 입행(1925년)했을 때 초봉이 80원, 그때 쌀 한 가마에 8원 내외였으니까, 쌀 10가마에 해당하는 꽤 많은 급료였다.
같은 초봉이라도 사립학교 졸업생은 10원의 차이를 두어 70원씩 받았다.
얘기가 약간 빗나가지만, 지금의 산업은행이 거액연체, 재원부족 등으로 산업금융채권을 발행한다. 일본에서 「뱅크·론」을 들여온다 하여 업무자금조달에 골치를 앓고 있는 것처럼 50여년 전 식산 은행의 사정도 비슷했다.
즉 식은 전신인 농공 은행의 한호(서울)·전주·광주·경상(대구)·평안(평양)·함경(원산) 등 6개 본점 총 자본금이 겨우1백47만원밖에 안되어 격증하는 대출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본금의 5배까지로 허용된 농공 채권을 발행했으나 지금의 산금채 같이 그 소화가 매우 부진했다.
산금 채는 안 말릴 경우 금융단이나 보험 단에라도 인수시키는 길이라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런 대안도 없어서 일반에 공모한 2회 농공 채권 발행 때는 60만엔 발행에 일반는 소화하는 겨우 10%선인 6만여 엔에 불과했었다.
이런데다 연체 대출이 총 대출의26%나 되었으니 요즘 산은은 그때에 비하면 오히려 성적이 좋은 편이다.
이 무렵 조선은행도 불경기에 허덕였다.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인한 경제적 혼란과 세계적인 경제불황으로 일본에서 금융공황의 기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더우기 서원차관(중국의 굴욕적인 대일 차관)등 식민 정책수행을 위한 대만주 고정 대부가 많아 그 타격은 매우 심각했다고 27년부터 본격화한 일본의 금융공황으로 대판은행·안전은행(현 부사은행전신)등 큰 은행들의 예금이 억류당하고 영업 정지사태까지 일어났으며 그 여파가 조선은행에 미칠까봐 동경 지점에서 모두 전전긍긍했었다.
한참 어려울 때는 대판·동경 등지로부터의「쿨·머니」가 상당한 액수에 달했는데 동경지점에서 제일 진땀뺀 일은 천기제백 은행으로부터의「콜·머니」6백만 엔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돌아 법석을 떨기도 했다.
횡빈정금 은행의 영목씨가 조선은행총재로 부임했을 때는 감원선풍이 불어 당시 동경지점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패용·서씨도 감원대상이 될까봐 은근히 걱정했다고 한다.
그때 일인동경지점지배인(지금의 지점장)은『나는 자신 있다』며 큰소리치다 결국은 감원되고 말았으나 구용서씨는 실력을 인정받아 이 감원 소동에서 제외되었고 3년 뒤에는 본점 외국 환계로 전임되어왔다.
구씨는 애주가여서 고송석하씨(민속학자) 손진태씨(민속학자=납북)등과 자주 어울려 술집을 순례하곤 했었다. 미도파 건너편의 화식접「이모즈」(지금의 명동입구)로부터 시작해서2차는 보신각 뒤에 있던「부벽루」, 3차는 명월 관을 전전하면서 밤새껏 술을 마시던 기억이 난다. 구용서씨는 은행에서의 진급도 빨라 우리 나라 사람으로는 해방이전에 조선은행지배인까지 승진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부산 지점차석을 거쳐 38년께 여수지점지배인으로 임명되었는데 한국인직원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라고 떠들어댔다.
이분이 여수지배인으로 근무할 때 조그만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일제는 만주사변에 이어 본격적인 중국침략을 준비하고있던 때라 여수에 해군비행장을 닦고 있었다. 이 정보를 들은 당시 동지점문서계의 한국인직원 왕모씨가 이를 오산학교 사감으로 있는 자기동생에게 편지로 알린 것이 화근이 되었다.
오산학교에 무슨 다른 일로 조사를 하던 평북 서원들에게 이 편지가 발각되어 왕씨는 군사기밀누설혐의로 여수 경찰서에 잡혀가 금고형을 받았고 책임자로 있던 구용서씨도 대판지점서부출장소 주임으로 좌천발령을 받게되었다.
그는 그때 사의를 표명했으나 본점 임원들이 말려 마지못해 부임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판지점으로 전임한지 2년 반만에 해방을 맞아 곧 본점 검사 역으로 전보발령이 났으나 귀국을 늦추다가 일본 조폐 국에서 찍은 조선은행권 3억 엔의 공수 작전에서 현송 책임을 맡아 그해 9월에 귀국했다.
비행기 3대에 1억엔씩 나누어 실어 온 이 돈은 패전에 따른 일본국민의 철수비용과 각종 국고지급을 위한 것인데 이를 조선 은행발권으로 감당케 하여 해방직후의 격심한「인플레」를 일으킨 동인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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