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포로에서 생환까지의 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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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워싱턴UPI동양】우리가 공산군을 만나 알게된 것은 「크메르」밀림 속 쑥 내민 총구 앞에서 시작하여 동트기 전 석방지점에서 악수를 나누며 헤어질 때까지의 그 뒤로 23일간이었다.
우리를 잡은 공산군 2명이 우리의 손을 뒤로 포승 지은 다음 근처에 있는 「벙커」로 들어가도록 명했다.
미군용탄대에 권총을 찬 장교가 나타나 『식사와 음료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겠다』면서 우리의 포승줄을 살피더니 『여기서 멀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 첫 행진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우리의 기나긴 피납길의 시초였지만 최악의 여정이었다.

<미군정찰기 선회>
목은 아직도 타오르는데다가 각자 등뒤로 묶여 앞뒤에 무장병이 따르는 가운데 속보로 꼬부랑길을 걸어가야 하는 괴로움-그리고 이 길은 우리가 「크메르」정부군과 재회할 희망을 걸었던 「다스칸초르」로부터 다시 멀어지는 것이었다.
미군정찰기들이 우리의 머리 위를 저공비행하곤 했으나 호송병들은 『뛰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말은 모두 일본전파 뉴스의 「스즈끼·도시이찌」 기자가 통역해주었다.
두 시간쯤 이 고생을 하면서 첫 휴식처에 도착한 우리는 길가에 누워 버렸다.
나는 호송병에게 수통을 머리짓으로 가리키면서 물을 요구했으나 그는 또다시 AK소총을 찰칵 소리내면서 일소해 버리는 눈치였다.
공산군이 『미국인』하고 부르는 소리 곁에서 『아니오, 영국인입니다』하고 「사라트」가 나를 위해 변명해 주는 소리, 그리고 「지미」가 어깨로 나를 건드리면서 『아가씨 물입니다』하는 소리에 눈이 번쩍 띄었다.

<40시간만에 식사>
우리는 다시 땅거미가 질 때까지 행진을 계속, 끝내 발견을 멈추었다. 다른 피납자들이 「크메르」인을 선두로 하나씩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
나는 『흥, 식사와 물이 있다고 하더니 차례로 쏴 죽이는 군』 하고 생각했다.
「크메르」인을 앞세우고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 생포자들이 월맹군에 문초 당했을 따름이라고 속삭여주면서 「크메르」 해방군의 포로가 됐으며 목숨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면서 곧 다른 곳으로 옮겨질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 항로에서 나는 맨발이었다는 것밖에 별로 기억하는 것이 없다.
줄곧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야반에 다다른 한 허술한 군용막사에서 나는 더듬는 영어를 하는 월맹병으로부터 그후 우리가 수없이 당한 같은 질문, 즉 성명·연령·계급 등에 관한 심문을 받았다.
그후 그들은 「바스킷」속에 담긴 밥과 멀건 돼지고기국을 내주었다. 실로 이것은 우리가 40시간만에 대해 보는 식사였으며 새벽까지 「벙커」 속에서 선잠을 잘 수 있었다.

<속옷 벗어 빨라고>
다음날 아침 냇가에서 세수와 세탁을 하는 나를 뒤쫓아온 경비병이 원색 무늬의 내의를 입은 나에게 속옷까지 벗어서 빨면 어떠냐는 몸짓을 하길래 웃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공노변의 큰 막사에 도착해서 근접거리에 떨어지는 폭탄에 겁을 먹는 우리를 보고 히죽히죽 웃던 공산병 하나가 『비행기를 무서워하는가』라고 물었다. 『대단히 무섭다』고 대답하니 그들은 또 한바탕 웃어댔다.
월남어로 비행기를 「마이·바이」라고 하는데 나는 『바이·바이·베이비』라는 곡의 가사를 고쳐 『마이·바이·베이비』라고 부르며 자위했고 영화 『이동외과병원』(MASH)의 주제가를 중얼거리면서 고통을 견디었다.
어떤 촌락의 빈집에서 밤을 지샌 우리는 다음날 몸과 옷에 어찌나 많은 이들이 붙어있는지 그 촌락을 「폼·타케이」(이의 촌락)라고 부르기로 했다.

<수용소를 기자촌>
도보로 형로 1천km 이상을 걸어 2주일간 우리가 수용되어 있을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냇가에 당도한 우리는 피납자나 경비병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알몸이 되어 물 속에 뛰어들었으며 사내들이 목욕을 하고 등을 돌려준 틈에 나도 1 주일동안 쌓인 먼지를 자꾸만 흐르는 눈물과 함께 씻어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약45m 떨어진 곳에는 우리가 「기자촌」이라고 명명키로 한 우리의 수용소가 기다리고 있었었다. <계속>

<웨브양 일시 귀국>
【시드니12일UPI동양】「크메르」전선 취재도중 지난 4월7일 공산군에 피납, 23일만에 풀려나온 UPI「프놈펜」지국장 「캐더틴·웨브」양(28)은 석방 열이틀만인 12일 고향 「시드니」로 일시 귀국했다. 이날 「시드니」의 각 신문사 기자들은 반나절 휴무까지 하면서 공항으로 「웨브」양을 출영했으며 신문 「텔레비젼」 방송 사진기자들은 「웨브」양을 포위, 질문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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