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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국민연금 탈퇴보다 더 큰 문제는 불신 바이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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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성식
정책사회 선임기자

노후를 걱정하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된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노후 준비는 다른 나라 얘기 같았다. 평균수명이 80세를 넘고 베이비부머(1955~63년생)의 퇴장이 시작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달 하순 성인남녀 1000명을 설문조사 했더니 가장 중점을 둬야 할 복지정책으로 노후생활이 첫째였다.

 행복한 노후의 필요충분조건은 소득과 건강이다. 소득의 화수분은 국민연금이다. 공무원연금처럼 수백만원은 아니지만 그나마 비빌 언덕이 거기뿐이다.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보험료가 속 쓰리지만 연금공단이 보내는 예상연금 안내문을 보면서 다소 안도한다. 발 빠른 사람은 퇴직연금·개인연금으로 다층설계도를 그린다. 물론 기본 층은 국민연금이다. 14일 유민포럼에서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장미란 복지론’을 폈다. 역도의 장 선수처럼 다리(경제를 의미)가 단단해야 복지를 얹을 수 있다는 걸 이렇게 표현했다. 다층 노후설계 역시 장 선수의 다리처럼 기본 층(국민연금)이 튼튼해야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1층이 흔들리고 있다. 올 초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기초연금 재원으로 국민연금 기금을 갖다 쓰느니, 둘을 연계한다느니 하면서 임의가입자(전업주부)가 대거 이탈했다. 지난달 25일 국민연금과 연계하는 기초연금 시행 방안이 나오자 연초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정부가 “연초보다 이탈자가 적다”고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800만 지역가입자다. 아직은 이탈 조짐이 없다고 안심이 안 된다. 설마 진영 전 복지부 장관의 우려처럼 100만 명이 이탈할까마는 실은 이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다. 불신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항생제가 듣지 않는다. 한번 마음이 멀어지면 좀체 되돌리기 쉽지 않다. 그동안 “오래 가입하는 게 유리하다”는 말이 귀에 못이 박일 정도였는데, 이제 와서 불이익을 보게 됐으니 배신감에 입맛이 씁쓸하다. 13년 차 가입자는 연금공단 게시판에 “조삼모사(朝三暮四)라고, 장기 가입자의 기초연금을 덜 준다고 하니…선거 때마다 장난질 치거나 좀 덜 주려고 수를 쓸 게 뻔하니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내 갈 길 가겠다”고 탈퇴의 변을 밝혔다.

 ‘소득은 없고 애들 학비는 많고, 퇴직금을 쪼개 연금보험료를 부어야 하나. 눈앞에 닥친 노후를 생각해서 보험료를 내야지. 어라, 그런데 오래 가입하면 기초연금이 최고 10만원 줄어든다고 했지. 어떻게 할까, 차라리 안 내고 말까’. 50대 실직자의 고민을 이렇게 상상해봤다. 50대들도 국민연금에 계속 가입할지 머뭇거릴 게 뻔하다. 선진국은 노후 소득의 50~60%를 연금이 보장하는데 국민연금은 16%만 보장한다. 이유는 가입기간이 짧아서다. 노후연금을 늘리는 확실한 방법은 가입기간을 늘리는 것이다. 어떡하든 오래 가입하게 도와야 하는데 난데없이 기초연금이 백태클을 걸고 있다. 초고령화 시대를 넘으려면 수시로 연금을 손봐야 한다. 노무현정부처럼 정권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불신이 가을 아침 안개처럼 서서히 번지고 있는데, 감히 개혁 얘기를 꺼낼 수 있을까.

 그렇지만 대상자를 소득 하위 70% 노인으로 제한하고 금액을 차등화하기로 한 것은 매우 용기 있는 결정이다. 그런데 차등화 방법으로 국민연금 연계를 택함으로써 그 용기가 빛을 바랬다. 정부는 “국민연금에 연계하지 않으면 연금액이 많은 장기가입자가 이중의 혜택을 본다”고 연금연계의 당위성을 설명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연계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국민연금 평균액이 31만원밖에 안 되고 지역가입자 연금은 시행한 지 14년밖에 안 됐다. 겨우 아장아장 걷는 애한테 뛰라고 재촉하는 격이다. 그러다 자빠지면 일어나기도 쉽지 않다. 설계하기에 따라 소득이나 연금가입자 평균소득(A값)에 연계하더라도 지속가능성과 형평성을 담보할 수 있다. 소득에는 국민연금도 포함된다. 간접적으로 연계된다. 현행 소득 연계 방식에 문제가 있으면 손보면 된다. 아무리 따져봐도 ‘국민연금 직접 연계’의 실익을 찾기 어렵다. 국민연금이 흔들리면 ‘국민연금 연계’ 공약 이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신성식 정책사회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