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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제10화>양식복장(5)이승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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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망또의 위세>
대문 밖에서 손님이 와서 찾아도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야하는 것이 우리 나라 고래의 습속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혹은 나이 어리더라도 헐으로 뛰어 나갔다간 흉잡히고 어른들에게 꾸중듣던 시절이다.
우리 나라에서 예복부터 들여온 것도 그런 점에 한 까닭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막상 구색을 갖춰 입기란 냉큼 쉬운 일이 아니다.
합방 당시 왕족과 고관들은 작위를 받고 또 돈까지 두둑하게 얻어 그것으로 옷치레하기에 바빴다. 대례복이 생겼으니 겸하여「인버네스」나 「망또」가 필요하다. 「인버네스」는 소매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망또」는 그것마저 없기 때문에 예복 위에 살짝 걸치기만 하면 되는 외투이다. 코끼리 귀처럼 생긴「케이프」가 어깨에서 털레털레 늘어지면 그게 또 좀 위풍이 당당한가.
원래 「인버네스」는 「스코틀란드」의 조그만 도시 이름을 딴 것인데 「멜톤」·낙타·「라샤」 등의 부드러운 복지로 만든다. 주로 야회용으로 연미복이나 「이브닝·코드」 위에 걸치게된 외 의라서 「인버네스·케이프」라고 한다.
「망또」란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 어이다. 「망또·도·꾸르」가 부인들이 궁중예복으로 입는 것이듯 남녀 공용의 「망또」도 예복으로 출발된 외투의 한가지다. 두 폭 혹은 세 폭으로 이어 만들어 옷자락까지 덮어씌우면서도 손을 자유로이 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처음 서울거리에 나타났을 때는 박쥐 옷으로 통칭 됐다. 고관대작들이 대례복 위에 걸쳐 입기에는 그런 외 의가 십상이었다. 물론 일본인의 모방이지만 따지고 보면 모처럼 해 입은 대례복의 금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데도 그런 외 의가 적격이었으리라.
「인버네스」 인기는 삽시간에 장안의 유행을 만들었다. 그것이 한복 위에 걸치는데도 편리하다는 점에서 행세하는 중로 층은 너도나도 해 입었다. 아예 호사스럽게 하기 위하여 빨간 공단을 안감으로 받치고 또 목에는 수달피 털까지 대는 것을 최상으로 여기었다. 아마 1920년 전후하여 그것은 결정을 이루었던 것 같다.
소매 없이 어깨로부터 내리덮은 박쥐 옷은 특히 남자 대학생들 사이에 총아로 등장했다. 「망또」가 그처럼 대학생의 사랑을 받은 것은 일본 「아까몽」(적문=동경제대)의 위력이 대견하던데 기인한다. 그때 「아까몽」하면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 학생의 경우 여기에 입학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일본 제1의 명문학교였기 때문이다.
그 제대 생들의 「망또」가 절대적인 영예를 누린 것은 그 「배지」에 있었으며 박쥐 날개 같은 「망또」의 한 자락을 슬쩍 어깨 뒤로 젖혀 「배지」를 보일라치면 누구에게서나 선망의 대상으로 대접받기에 족하였었다. 그쯤 되니 젊은 여성들로부터 받는 흠모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런 일본의 영향이 이 땅에 번져 넉살좋은 학생들은 사각모를 쓰고서도 가슴팍의 「배지」를 더 과시하려는 듯이 연신 「망또」 자락을 젖혀가며 걷기에 길을 쓸다시피 하였다.
1913년부터 1915년에 이르는 동안 매일신보에는 그런 「망또」의 위세를 떨치는 대학생의 얘기가 연재소설로 발표돼 폭발적인 화제를 모았다.
그 인기의 소설은 조일재의 "장한몽"-<대동강변 부벽루에 산보하는…>으로 시작되는 주제가와 더불어 촌극의 「레퍼터리」 목록에 들 정도로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른 이수일과 심순애의 애정과 금력이 엇갈린 삼각 연애 얘기다.
"장한몽" 은 일본소설 "금색야우"를 번안한 것이지만 이 무렵의 번안 작품 중에서는 가장 인기가 높았고 또 우리 나라 신문연재 애정 소설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오늘에 보면 그 내용은 값싼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지만 그때 형편으로서는 많은 독자의 심금을 울린 나머지 이수일 「스타일」을 선풍적으로 유행시켰던 것이다. "장한몽" 소설의 옛 책표지에는 남 주인공인 대학생 이수일의「망또」입은 모습이 「클로스 업」 돼 있는데 모두 그 시절의 「망또」에 대한 인기를 등에 업고 나온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망또」 의 유행은 더욱 「피치」를 올렸다.
「망또」와 「인버네스」는 예복으로 시작하여 한복에도 적용됐으나 역시 계절의 제한이 있었다.
당시 개화를 올바로 받아들이기는 일찍부터 해외를 자주 왕래한 윤치호씨이다. 1881년 17세의 약관으로 일본에 신사 유람단의 일원으로 파견된바 있는 그는 일찍부터 양복으로 바꿔 입은 사람의 한사람일 것이다. 비록 한복이라 하더라도 풍덩한 바지를 양복「즈봉」처럼 통을 좁게 해 밑 대님을 맸고 두루마기의 옷고름을 단추로 바꾸어 간소화의 첫발을 내디딘 것도 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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