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59)|맥아더의 집념(2)|인천 상륙(2)|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45년8월30일 일본의 후목 비행장에 첫 발을 내디딘 맥아더 원수는 『「멜버른」 (호주수도) 서 동경까지의 길은 멀었다』고 말함으로써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의 연합군이 겪은 악전 고투를 회상했지만 한국 전쟁 때 「맥」 원수의 동경으로부터 인천까지의 길도 결코 가깝지는 않았다.
「맥」원수가 인천 상륙을 처음으로 머리에 그린 것은 전쟁 발발 4일째인 6월29일 그가 한강 둑에서 이미 괴뢰군 수중에 들어간 수도 서울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이때의 상황을 「맥」원수와 동행한 「코트니·휘트니」소장 (당시 미 극동 군사 민정 국장)은 그의 저서 『맥아더와 역사와 해후』 (MacArthur. His Rendezvous with History)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둑 위에서 한시간 가까이 비참한 광경을 바라다 본 일행은 각자가 모두 지금 이 판국에 미 극동군이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동란 4일째 한강 둑서 발상>
맥아더 원수는 검은 연기가 치솟는 서울과 그 주변에 눈길을 돌리고 있었지만 무엇을 머리에 그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맥」원수만이 이런 불행한 사태의 본질을 규명하고 적절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맥아더 원수 자신은 그의 『회고록』 (Reminiscences of Douglas MacArthur)에서 이때 심경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강 둑에서 나는 현재의 절망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결국 그 방법이란 지상군의 투입과 패배를 승리로 역전시키는 유일한 전략 기동 즉 인천 상륙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이 방법을 구체화하기 위한 가능성을 검토한 것이다.』
맥아더는 북괴군의 현재 진격 속도로 미루어볼 때 미군이 낙동강 연변에 발판을 만들 시간적 여유가 없을지 모르지만 지상군을 투입, 이를 전략적으로 잘 운용한다면 적의 남하를 일시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미 해공군의 우세는 절대적이니까, 북괴의 지상군을 어디서 한때 막는다면 적의 배후 요지인 인천에 상륙해서 협격 분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천 상륙 안은 이런 웅대한 구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 착상은 다분히 그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과 싸운 경험을 원용한 데서 얻어졌다고 볼 수 있다.

<첫 계획 상륙 일은 7월22일>
알다시피 1943년에 서 남미 태평양 사령관으로서 대반격에 나선 맥아더 원수는 제공·제해권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오끼나와」 까지 징검다리를 건너는 식으로 북상했던 것이다. 맥 원수가 태평양에서 지도한 11회의 상륙 작전은 모두가 「라바울」이나 「파라오」같은 강력한 일본군 요새는 그냥 스치고 지나가 그 배후에 상륙, 이들 거점을 무력화한 것이었다. 이러한 체험에서 얻어진 절대 자신은 「맥」 원수의 머리에 요지부동하게 박혔다. 「맥」 원수가 한강 둑에 섰을 때 태평양에서의 이 「도식」을 한반도에서도 실험하자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을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집념이 없었더라면, 인천 상륙 안을 둘러싼 워싱턴과의 줄기찬 논쟁을 이겨내지 못 했을 것이다.
6월30일 「트루먼」대통령으로부터 『남침한 북괴군을 38선 원 위치로 격퇴하라』는 명령을 받은 맥아더 원수는 『괴뢰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적 후방에 상륙하여 보급로를 끊고 남북으로부터 호응해서 단숨에 적을 격파한다』는 작전 구상을 전군에 명시했다.
맥아더는 이미 7월1일에 미 극동군 참모장 「네드·알먼드」소장에게 상륙 지점의 연구를 지시하고 7월4일에는 정식으로 관동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미 제1기병 사단에 인천 상륙 준비를 명령했다. 「블루·하트스」 (Blue Hearts)라고 명명된 이 계획은 인천 상륙을 7월22일께로 잡고 있었다.
미 제1기병 사단은 분주히 출동을 준비하여 제1진은 7월6일에 횡빈에서 배에 올랐다. 그런데 북괴군의 전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여 이미 투입한 미24사단과 제25사단의 지상군으로써는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래서 부득이 인천 상륙에 쓰려던 미 제1기병사단도 적 저지에 투입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맥아더는 7월10일에 「블루·하트스」계획을 폐기하고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 대신 동해의 영일만에 상륙케 했다. 그가 구상한 인천 상륙 계획의 첫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블루·하트스」계획을 폐기한 후에도 계속해서 특별 계획반에 상륙 작전을 연구시켰다.
이 계획반은 육해 공군으로부터 상륙 작전 전문가를 선출 편성한 것으로 합동 전략 계획 및 작전반 (jount strategic plans and operation group)라고 불렀다. (약칭은 JSPOG). 7월23일에 맥아더는 그 동안 JSPOG에서 연구 작성한 상륙 안을 사령 부내의 각 부과에 전달했다. 「크로마이트」(Chromite)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본국으로부터 내원 중인 미 해병대와 제2보병사단으로 9월중에 다음 3개 지점 중의 어느 한곳에 상륙한다는 내용이었다.

<추수기 전 수복도 고려되고>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수원 지역을 점령한다. 이때 「월튼·워커」 장군 지휘하의 미제8군도 동시에 반격을 개시한다.
▲군산에 상륙, 대전을 향해 공격을 가함으로써 적의 우측 배면을 휩쓴다.
▲동해안의 주문진 이북에 상륙하여 강릉을 점령한 후 원주로 향해 진격하여 적 후방을 차단한다.
「크로마이트」 계획에는 이렇게 세안이 있었지만 맥아더는 처음부터 제1안, 즉 인천 상륙을 채택했다는 것은 나중에 벌어진 워싱턴과의 논쟁에서도 분명히 엿볼 수 있다. 또한 상륙 시일을 9월중으로 잡은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고려에서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즉 상륙 일자가 너무 늦어지면, 근 두 달에 걸친 격전으로 지친 미 제8군이 붕괴돼서 밑천도 건지지 못하게될지 모른다. 또한 인천의 방비가 강화되어 기뢰가 대거 부실 되면 상륙할 수 없게될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정략적인 고려지만, 추수기인 10월 이전에 남한을 수복하지 못하면 식량의 결핍으로 전쟁 수행의 기틀이나 부흥의 기회를 영영 잃게된다는 이유도 다분히 작용했다.
한편 시간이 「유엔」군 편이라고 깨달은 북괴군은 8월 총 공세를 전개하여 대구 부산을 단시일 안에 점령하려고 했다. 이래서 「워커」장군 지휘하의 미8군은 낙동강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병력의 증원이 없는 한 부산 대구 거점을 유지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상황을 냉철하게 관찰한 맥아더 원수는 미8군이 현재 병력으로써는 적의 중압에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인천 상륙의 전제는 어디까지나 부산의 확보에 있는 만큼 8군을 증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맥아더 원수는 다시 「크로마이트」계획의 변경과 연기를 결심하고 내원 중인 인천 상륙 용의 미 해병대와 미 제2사단에 부산 직행을 명령했다. 이래서 인천 상륙 계획은 두 번째의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인천에 상륙하겠다는 맥아더의 집념은 7월29일에 워싱턴에 보낸 다음의 보고에서도 역력히 나타나 있다.
『반격 병력으로서 해병대와 제2사단을 온존해 두려는 본인의 소망은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이 부대들도 낙동강 전선에 급파해야 하겠다. … 그래서 9월 중순의 상륙 작전에는 일본에 있는 제7보병사단을 충당해서 사용할 계획이다.』
해병대와 2사단의 증원을 얻은 「워커」 장군은 북괴군의 8월 총 공세를 저지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워싱턴과 논쟁 예기 못해>
「워커」는 『방어는 반격으로 성립된다』 는 지론에 따라 여러 병 종의 종합 전력을 적시적소에 기동시켜 돌파된 진지를 메우며 역상을 반복하여 적의 돌진을 저지했다.
낙동강 변에서 염천 하에 피의 공방전이 한참일 무렵, 동경에서는 꾸준히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맥아더 원수는 8월12일에 「크로마이트」 계획 제1안 (인천 상륙) 의 발동을 명령하고 상륙 부대를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보병사단, 한국군 일부로 정하고 공격 목표를 「인천∼서울 지구」라고 명시했다.
8월12일은 미8군이 모처럼 전개한 대 반격 작전인 「킨」 작전 (본 연재 130과 131회 참조)이 진주 전면에서 정돈 상태에 빠지고 낙동강 돌출부에서는 영산이 위협을 받아 전반 전세가 아주 불리한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이날 인천 상륙 계획을 발동시켰고, 이어 15일에는 JSPOG 요원으로 제10군단 사령부 참모부를 편성하여 물샐 틈 없는 인천 상륙 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맥아더 원수는 7월 하순부터 몇 차례에 걸쳐 북괴군 배후에 상륙하겠다는 의향을 워싱턴에 보고했는데 국방성에서는 암암리에 이에 찬성을 표명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방성은 「맥」원수가 그렇게도 대 도박인 인천 상륙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막연히 「적의 배후」라고 보고했기 때문에 그저 통례적인 상륙 작전을 계획하고 있는 줄로 짐작했다. 그래서 「맥」원수의 요청대로 상륙 작전 용 자재나 공수 전투단과 특별 공병여단 등을 정비해서 극동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로서는 워싱턴의 수뇌자들이 자기의 작전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고 전적으로 지원해 주리라는 생각에서 인천 상륙의 구체적 준비를 진행시켰다. 상륙 직전에 벌어진 워싱턴과의 논쟁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