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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투표가 무죄? 법이 허무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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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영기
논설위원

송경근(49) 부장판사가 재판장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가 “통합진보당 당원들의 대리투표는 무죄”라고 판결했습니다. 많은 시민이 혼란에 빠졌습니다. 형사35부는 ‘어떤 경우에 투표는 다른 사람이 대신해줘도 된다’고 결론을 내린 겁니다. 정당의 경선을 직접·비밀 투표로 해야 한다는 법 규정이 없다는 것, 통진당의 온라인투표는 처음부터 대리투표를 전제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재판부가 들이댄 논리였습니다. 저는 해괴한 결론, 상식을 삼켜버린 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조 경력 20년인 송 판사의 재판부가 어떻게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됐는지 그 ‘논리의 여행’을 좇아가 봤습니다.

 31쪽에 이르는 판결문에서 판단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재판부가 따라갔던 이정표는 “규정이 있어야 죄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당의 경선에 대하여는 헌법이나 법률 어디에도 이러한(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로 선출해야 한다는 명문)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법은…구체적인 선출 방법이나 절차에 관하여 아무런 규정이 없다”는 것처럼 ‘규정이 없다’는 얘기가 수도 없이 나옵니다.

 ‘규정이 있어야 죄를 물을 수 있다’는 이정표는, 근대 법에서 시민이 애매하고 포괄적인 법 규정 때문에 당할 수 있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죄형 법정주의’ 장치입니다. 하지만 규정이 없어도 죄 되는 게 있습니다. 누구나 그걸 위반하면 죄가 된다고 여기는 그런 거죠. 자연법, 관습법, 역사의 투쟁을 통해서 확립된 정치적 공리(公理) 같은 겁니다. ‘투표는 직접·비밀로 해야 한다’는 명제는 애매한 것도 포괄적인 것도 아닙니다. 근대 민주사회의 자명하고 절대적이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연법 같은 공리입니다.

 선거의 4대 원칙은 전제나 조건이 필요 없는 스스로 진실입니다. 열거돼야만 죄를 물을 수 있는 죄형 법정주의가 적용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송 판사가 규정주의 이정표를 따라가다가 민주주의의 자명한 진실을 놓친 게 아닐까요.

 재판부의 논리의 여행에서 특이한 건 사람의 문제를 다루다가 환경의 문제로 빠져들더니 결국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방식입니다. 온라인으로 대리투표를 한 당원들이 문제가 있긴 한데 통진당이란 정당 환경이 대리투표를 허용하는 분위기였기에 개인에겐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전자투표를 실시한 통진당의 선거관리업무 담당자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직접투표라는 최선의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고 이들(대리투표 당원)에 대하여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다”(29쪽)는 대목 좀 보십시오. 주체와 환경을 오락가락하며 약간의 트릭을 쓴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책임져야 할 죄를 주체에서 환경으로 살짝 돌린 뒤 결국 아무도 처벌받지 않게 만드는 논리 구조죠. 환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체의 죄가 면제될 수 있습니까. 환경의 영향은 정상 참작의 여지를 제공할 뿐 유죄를 무죄로 바꿀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재판부는 똑같은 환경 속에서 유혹을 뿌리치고 양심과 자연법에 따라 대리투표를 하지 않은 훨씬 많은 당원들의 허무함은 왜 고려하지 않습니까. 의도일까요, 실수일까요. 어떤 경우든 재판부가 법 허무주의를 퍼뜨렸다는 비판을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마지막으로 자율성의 문제입니다. 모든 자율엔 제한이 있습니다. 불법을 허용하는 자율은 없습니다. 그런데 재판부는 정당의 자율성에 심취된 나머지 ‘정당이 선거에서 후보자를 추천할 때에는 민주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선거법상의 제한 규정을 너무 가볍게 취급했더군요. “통상적인 수준의 대리투표는…선거제도의 본질적 기능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20~21쪽)는 대목에선 아연실색했습니다. 대리투표에도 통상적인 수준이 있다니요. 기자 생활 27년 동안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송 판사는 법조 내부에서 오만과 편견이 별로 없는 존경받는 판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논리는 그럴듯한데 사실은 아니고, 나무는 본 것 같은데 숲은 못 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규정이 없어도 자명한 진실이 있고, 죄는 환경이 아닌 주체에 물어야 하며, 자율엔 언제나 제한이 따른다는 점을 간과한 결과입니다.

전영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