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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면 가닥엔 피란민의 애절한 삶 송도 해수욕장엔 ‘야타족’의 추억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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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26면

저자: 유승훈 출판사: 글항아리 가격: 2만800원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할 때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커피와 노래방, 찜질방의 유행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트렌드의 전진기지인 서울 강남일까?

『부산은 넓다』

정답은 부산이다. 오랜 세월 불려온 대한민국 ‘제 2의 도시’란 타이틀은 산업화 시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자 수출입의 관문 역할을 했던 부산항 덕에 얻은 것. 그러나 경제성장의 축이었던 부산항은 후기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점차 그 존재감을 잃어가고, 이제 부산을 성장시대의 논리인 ‘제 2의 도시’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역사민속학자인 저자는 우열관계를 떠나 도시의 독자적 가치와 삶의 질을 따지는 시대가 된 지금, 부산의 정체성을 새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의 전면에서 높은 파도를 맞아온 탓에 다른 도시에선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역사적 경험을 간직하고 있는 부산이 이를 콘텐트로 승화시키는 데는 서툴다는 것.

그의 방법론은 시대와 소재 구분을 초월해 사람들의 삶의 흔적에 초점을 맞춘 말랑말랑한 생활문화사다. 조선후기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근현대사 속에서 가요와 다방, 국수와 영화, 축제와 자살에 이르는 광범위한 모티브를 종횡무진 넘나든다.

저자의 채널에 포착된 부산의 정체성은 순환과 재생, 소통이라는 항구의 인문정신이다. 조선후기 일본인과의 만남과 상생을 위해 세운 초량 왜관에서 시작된 소통의 역사가 외부 문화를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재창조해 내륙에 전달해 온 부산의 정신을 말해 준다. 일제 때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근대의 총아’였던 영도다리는 전쟁 통에 피란민들을 보듬어 주는 생활의 장소가 됐고, 이산과 만남, 이별 등 한국인의 아픈 정서를 대변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동래 온천 입구에 선 기묘한 노인상은 알고 보면 개화기 부산의 상징물. 어색한 차림새에서 조선·일본·서구가 혼합되고 전통과 근대가 착종되던 1920년대를 읽을 수 있다.

요즘 절정에 달한 커피전문점 문화의 원조가 피란 시절 부산에서 문학과 현실의 괴리를 고민하던 문인들의 다방 집결이었다는 점, 고질적인 사회문제 투신자살의 유행 또한 영도다리에서 시작됐다는 점도 흥미롭다. 부산 대표음식 밀면 가닥에 피란민의 애절한 삶이 사무쳐 있음을 알까. 가족과 생이별한 이북피란민들이 고향을 그리며 함경도 냉면과 경상도 국수에 서양 밀가루를 버무린 밀면은 그 자체로 ‘문화접변’이다.

휴가지에서의 로맨스를 꿈꾸며 바다를 찾는 풍토도 부산에서 시작됐다. 대한민국 1호 해수욕장인 송도해수욕장은 100년 전 개장 당시만 해도 유교적 체면에 젖어 있던 조선인들에게 문화 충격이자 이국문화를 접하는 신세계였다. ‘활활 벗어버린 몸뚱이들’이 로맨스와 일탈을 꿈꾸며 여성에게 보트를 타고 가 “타시지요”라고 유인하는 ‘야타족’까지 등장했다니 인간의 삶의 행태는 예나 오늘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먼 남쪽, 나와는 상관없는 땅으로 여겨 온 부산이라는 동네가 사람들의 삶의 흔적과 어우러지니 성큼 가깝게 다가온다. 오래된 다리 하나, 산기슭의 외딴 사당 한 채도 숨겨진 사연과 함께 되살아난다. 그 도시만의 역사문화콘텐트란 이런 오래된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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