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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제자는 필자|<제8화>황성기독청년회(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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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반상 철폐에 앞장>
YMCA 초대 회장이 「게일」(J·S·Cale)씨란 말을 한바 있다. 그는 「캐나다」 「토론터」대학을 다닐 때 그 대학 안에 있던 대학 YMCA의 파송을 받아온 분이다. 그의 월급도 그 대학에서 대고 모든 뒷바라지를 그 대학이 담당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처음부터 YMCA에 관계하여 그 초대회장이 되었다. 본래부터 학문을 좋아했기 때문에 유명한 역사가인 이능화씨의 부친인 이원긍씨를 비롯하여 이상재 홍재기 안국선 김정식씨 등 독립협회의 지도자들이 감옥에서 풀려 나오자 자기 교회(연동장로교회)로 끌어 들였다(1904년).
그리고 어학 선생 겸 조사로서 김창직씨와 고찬익씨를 날마다 끼고 다녔다.
이 두 사람은 전혀 출신이 달랐다. 김씨는 선비출신이고 고씨는 칠천역에 속하는 천인이었다. 김씨는 『한문에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으리 만큼』글 잘하고 문필에 능한 학자인 반면에 고씨는 재간은 비상했지만 갓바치오 노름꾼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인데 고씨는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잠깐 어디 갔다가 온다고 하며 나갔다가 며칠 갓바치 일을 하거나 노름만에 틀어가 돈을 벌어 가지고 오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일 박사는 고찬익씨를 초대장로로 세웠던 것이다(1904년). 그리고 고씨가 끌어들인 그 당시 유명한 광대이며 갓바치 출신인 임공진이라는 사람을 또다시 장로로 세우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기일 박사는 임씨를 매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장구치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게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면서 한국 특유의 찬송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기일 목사의 처사에 대하여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원경씨였다. 그는 본래 양반출신인데다가 유학자였으므로 광대나 갓바치의 하는 짓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교인 수백명을 데리고 나와서 따로이 묘동교회를 세우게 되었다(1910년). 그리고 논어·맹자 등을 천독만독하듯이 성경을 가르치며 사경회만을 자꾸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교회를 사경교회라고 불렀다. 하나 그 교회교인들은 싸움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경교회라고 놀려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안동교회에도 있다. 안동교회는 비천한 교인들과 같이 예배를 보기 싫어서 승동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인들과 일등양반이라고 할 수 있는 박승봉(평안감사) 씨, 전길준씨의 동생인 전성준씨, 전 대통령 윤보선씨의 부친인 윤치소씨 등과 같은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교회를 양반교회라고 했다. 하나 양반들은 예수를 믿지만 거짓 절반 위선절반으로 산다고 해서 거짓 양자 양반교회라고도 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는 아무리 만인평등의 신앙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양반들과 천민들의 차별이 심했다. 하나 YMCA에 있어서는 비교적 이러한 알력이 심하지 않았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YMCA는 초창기부터 양반출신의 지도자들과 천민출신의 지도자들이 비교적 의좋게 지냈다. 그리고 서로 협력하여 계급을 타파하고 미천한 직업이라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과감하게 보급하였다.
가령 목공부·철공부를 설치하여 목수땜장이·양철장이·대장장이 등을 길러낸 것이라든지, 인쇄부·사진부·염색부·조선부 등을 두어 사진장이·식자장이·물감장수·배꾼 등을 길러낸 것이라든지, 특히 제화부를 두어 수많은 갓바치를 길러낸 것 등은 참으로 과감한 일이었다. 나라를 잘 살게 하려면 우선 폐물이용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백정들이 내버린 소가죽을 잘 이겨서 쓸 수 있으며, 그 가죽을 가지고 서양식 구두를 만들어 신으면 빨리 걸을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다.
YMCA회원들은 제화부에서 만든 구두를 걸머지고 전국으로 팔러 다녔다. 말하자면 그들이 다 갓바치가 된 셈이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는데 기술자들 많이 배출해야 나라를 부하기 만들 수 있다는 일념에서 그 당시 개화꾼들은 개화모(도리우찌) 쓰고 개화경(안경)불이고 개화장(지팡이)휘두르면서 3천리 방방곡곡을 찾아 다녔다.
이러한 개화꾼들의 세력이 컸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회적 반발도 이겨낼 수 있었다. 가령 김규식씨는 고아였다. 그는 유배당한 정치범의 자손이다. 가난한 친척집에 있는 것을 가서보니 배가 고파 벽종이를 바락바락 뜯어먹고 있었다. 새문안 교회 목사였던 언더우드씨는 그가 7세때 데려다가 키웠다. 그리고 1896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8년 뒤인 1904년에 귀국한 후에는 YMCA의 초대학관장이 되게 했다.
그야말로 유명한 개화꾼이였다. 영어를 하도 잘해서 초대총무인 질레트씨도 영문으로 보고서를 쓰거나 어려운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김규식씨의 교정을 받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화꾼이 있었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회적 반발도 능히 막아낼 수 있었다. <계속> 【오리 전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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