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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제자는 필자>|<제8화> 황성 기독 청년회 (4)|오리 전택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천민의 개화>
1904년 김종상씨는 YMCA 초대 체육 간사의 명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들어가 본즉 광속에는 곤봉이 주르르 걸려 있고 한쪽 구석에는 아령도 있었다. 이것은 YMCA 건물을 지을 때 대지 일부를 기부한 현흥택씨가 1883년 민영익 특명 대사의 수원이 되어 그 북미주와 구라파를 다녀올 때 수입해 온 것인데 처음에는 영어 그대로 「덤벨」(Dumbell) 또는「인디언·클럽 (Indian Club)으로 통했고, 아령 또는 곤봉이란 말은 썩 후에 가서 생긴 말이다.·
그래서 김종상씨는 YMCA 회원들에게 「덤벨」과 「인디언·클럽」부터 가르쳤다. 그리고 높이뛰기·넓이뛰기 철봉도 시작했다. 야구가 시작되기는 1904년쯤부터이다. YMCA 총무이던 「질레트」(길예태) 씨가 야구를 처음 수입해 왔고, 제대로 연습을 하기는 경신학교 운동장 (옛날 경신학교 자리)에서 김일 한민제 등 일본 유학생들이 여름방학 때에 왔다가 학생들과 같이 한 것이 야구 경기의 효시가 되었다. 최초의 야구 선수로서는 포수를 보던 김일 민충식, 투수를 보던 박덕상씨, 1루수를 보던 현동진씨 등이며 김종상씨는 3루수를 보았다. 한민제씨는 이것저것 다 잘했으나 주로 심판을 보았다. 그 후 YMCA 야구는 꾸준히 발전하여 1912년에 가서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일본 원정「팀」을 파송하기까지했다.
경주는 김종상씨의 독차지였다. 하나 민충식씨가 들어 온후에는 우승「메달」을 언제나 그에게 빼앗겼으며, 민충식씨는 그때에 탔던 「메달」 두개를 최근까지 간직하고 있었는데 아깝게도 아이들이 가지고 놀다가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체조를 가르칠 때는 애를 먹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팔을 폈다 구부렸다 하거나, 다리를 들썩들썩 하는 것을 천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체조를 할 때 갓신이 훌렁 벗겨져나갔다. 그래도 선생들이 체조를 강행하니까 이풍한 한준호 (한규설씨의 조카) 황윤주 (옥관자를 붙이고 다녔다)씨 등 6, 7명의 귀족 출신의 학생들은 상놈의 학교라면서 퇴학해 나가서 이인영씨 등 13, 14명만 남았다고 한다. (영어과)
말이 나온 김에 재래의 직업 제도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우리 나라에는 양반·중인·상인·천인의 4계급이 있었고, 직업별로 말하면 사농공상의 4직업이 있다. 하나 이 4계급과 직업에도 들지 못하는 7천 역이란 등외 계급이 있었다.
7천 역이란 백정·갓바치·고리장·기생·무당·포졸·광대를 말함이다. 갓바치 즉 지금의 제화 기능공도 7천 역이오, 고리장 즉 여러가지 미술품을 만드는 세죽공도 7천 역이요, 기생 즉 황진이와 같은 여류 작가들도 7천 역이요, 무당 즉 인생의 생사 화복을 점치고 복 빌어주는 종교가도 7천 역이오, 포졸 즉 국가의 치안을 맡아 수고하는 경찰도 7천 역이오, 광대 즉 홍난파와 이동백과 같은 음악가들과 나운규와 배귀자 같은 연예가들도 7천 역이었다.
백정의 경우…이 직업은 정말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백정들은 망건도 못쓰고 두루마기도 못 입었다. 아무리 노인이라도 아이들이 하대 말을 했다. 그래서 백정들은 갑오경장 직후에 백정 해방 운동을 일으켰다.
「무어」라는 선교사의 지도 아래 박성춘이란 백정이 들고일어나서 고종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다. ①우리도 갓을 쓰고 망건도 쓰게 해주시오. ②아이들이 하대 말을 못하게 해주시오. ③평민들과 동석하여 예배를 볼 수 있는 권리를 주시오…하는 요지의 탄원서였다.
결국 이 탄원서가 용납이 되어 백정들이 오랜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백정들은 너무나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너무나 기쁜 김에 갓을 쓴 채로 잤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비가 왜놈들 칼에 맞아 살해되자 백정들이 고종이 슬피 울 때 초하루 보름으로 분향하러 다니는 행차 길에다 버드나무를 심었다. 그것이 청량리 밖의 가로수이다. 70∼80년 묵은 고목을 난벌 하는 것도 괘씸하지만 이런 유서 깊은 버드나무를 몰라주는 우리 후손들도 딱하다.
그후 백정의 두목인 박성춘씨는 승동 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고 그의 아들인 박서양씨는 한국 최초의 의학 박사가 되고 서양 음악의 개척자가 되었다.
이 두 부자는 개화꾼중의 개화꾼이다. 1898년 만민 공동회 운동에도 가담하여 불의와 싸웠고 예수교 발전에도 큰 공을 세웠는데 그러한 것은 다 제외하고 YMCA 운동에 관한 것만을 말한다.
박서양씨는 YMCA 초창기의 화학과 물리 선생이었다. 과학이면 무엇이나 그가 다 가르쳤다. YMCA 안에서 화학 실험을 하고 짐승을 잡아다가 해부학을 가르쳤다. 그 후 중앙학교와 중동학교 같은데서 가르칠 때는 백정이라고 학생들에게 무시도 많이 받았다. 하나 그는 태연스럽게 「내 속의 5백년 묵은 백정의 피만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라」고 외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음악을 잘했다. 더욱 성악에 뛰어나서 뽑혀 다녔다. 초대 서양 음악가라 하면 홍난파만을 아는데, 젊은 세대는 홍난파 위에 김인식씨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김인식씨 전에 박서양씨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와 같은 개화꾼 때문에 과학이 싹트고 음악과 연극과 문학이 싹텄다는 사실을 통 모르고 있다. 그 후 박서양 일가는 크게 번창하여 음악계는 물론 교육계 정치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행세하는 집안이 많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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