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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학도의용병(4)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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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사단 학병중대>(1)
국군 제3사단 직할 「학도의용군 중대」는 중대장부터 말단대원에 이르기까지 전원이 학생으로 편성된 부대였다. 다른 학도의용군 부대는 대개 기간요원은 현역 장교로 충당됐는데 3사단의 경우만은 예외였다.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도 8월 하순부터는 중대장만은 현역장교가 맡았지만 그전에는 학생만으로 대소의 전투를 치렀다. 특히 6·25학병전사로서는 가장 애처로운 기록인 포항여중 전투에서는 이 학생중대가 사단 CP경비에 임하다가 적의 기습공격으로 48명이 한꺼번에 전사하고 수명이 포로가 되었다. 누구보다도 애국심에 불타있지만 훈련이 미숙한 이들 학생만으로 단일부대를 형성, 전투에 투입한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였다.
물론 이것은 학생들 자신의 요망과 사기 앙양 등의 문제를 고려해서 취한 조치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학도병들의 희생을 더 내게 했다. 이런 큰 희생은 있었지만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는 전투에서나 이북에서의 선무 공작에서나 어느 학도부대보다도 잘 싸우고 활약이 컸다.

<대전서부터 의용대 조직>
▲김용섭씨(당시 서울사대교육과 2년·3사단 학도의용군중대장·현 사업·41) 『7월1일·대전서 「대한의용학도대」에 들어갔는데 5일에 정훈국에서 금강전투에 참전할 학도를 모집하여 나도 지원했습니다. 1차로 44명만 뽑아 무기도 없이 교복 그대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의용학도대」완장만 차고 떠났어요.
나는 1차 선발에는 못 끼었습니다. 이때 출전한 내 동기인 김명훈군은 전사하여 지금도 사대교정에 추모비가 있지요. 그후 나는 사대생 6명과 함께 마산에 가서 선무 공작을 하다가 전황이 궁금해 다시 대구에 올라갔어요.
거기서 김득신·박갑득·김시제군 등을 만나서 전선으로 나갈 것을 상의했지요. 김시제군이 김석원 장군과 친면이 있다고 하면서 수도사단에 다녀오더니 김 장군이 학병을 받아주겠다는 전갈을 가지고 왔어요. 급히 대원을 모집했는데도 1차에 39명이 모이더군요. 임시 소대를 편성하고 대장에는 내가, 선임 하사에는 유명욱군이, 향도엔 조모군이 됐어요.
7월26일에 「트럭」으로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역 광장으로 나갔더니 대한부인회에서 나와 열렬한 환송을 해줍디다. 27일 새벽에 안동에 도착하여 수도사단 사령부가 있는 교회로 찾아갔죠.
이날 하오에 구구식 장총을 지급 받고 자체로 집총 훈련을 시작했지요.
밤이 돼서야 장교 한 명이 사단에서 나와 전황설명을 해주고 야간전투에 대한 교육을 새벽 1시까지 시킵디다.
이튿날에는 현역군인이 안나와서 우리자체로 훈련을, 계속했는데 3일이 지나서야 김 사단장이 나오셔서 반가이 맞으며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더군요.
이러다가 김 사단장이 3사단장으로 전임돼버려 우리는 그분 뒤를 따르기로 작정하고 8월7일에 포항에 도착했습니다. 포항여중에 있는 3사단사령부로 찾아갔는데 거기에는 김대의 대위가 연락장교로 사병 몇 명을 데리고 와있고, 그밖에 20여명의 군악대원 밖에 없어요. 이날로 M-1을 지급 받고 이튿날 대원을 데리고 시내를 구보로 달리다가 안강 전방 CP로 가는 김석원 사단장을 만났지요. 반가와 하시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합디다.
10일에 다시 중대 편성을 했어요. 간부는 투표로 결정했는데 중대장엔 내가, 1소대장엔 유명욱군이, 2소대장엔 김일호군이, 연락병에는 김춘식군이 각각 선출됐어요. 이렇게 막 편성을 마치고 총기 수입을 한 다음 자정이 넘어 취침했는데 상오 4시30분에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세칭 포항여중 앞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김용섭 중대장의 이야기를 잠깐 중단하고 이번에는 3사단 학병중대에서 최연소자(15)였던 김만규씨(당시 대구성광중학3년·현 대구염광교회 목사·36)의 증언을 들어보겠다.
『7월25일에 친구 최현식군과 「의용학도대」 앞을 지나며 보니까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김석원 장군 휘하로」라는 「플래카드」가 나붙어있어요. 그 길로 들어가서 학도병에 지원한다고 했더니 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안 된다는 거예요.
사정사정해서 지원서에 무인을 찍고 수속을 마쳤지요. 집에 가서 형한테 이야기했더니 대뜸 어린애가 무슨 싸움이냐고 호통이에요. 그대로 집을 나와 이날 밤은 친구 집에서 잤죠. 27일 의용대 본부에 나가보니까 48명이 모였는데 모두 나보다 큰 학생들입디다. 이날은 동인 여관에서 합숙을 하고 이튿날 육본서 보낸 두 대의 「트럭」에 타고 신바람 나게 시내를 한 바퀴 돈 다음 역에 도착했습니다.

<적 탱크 폭파 결사대 조직>
이때 황기태 대원(현 대구「애플·와인」공무계장)의 애인이 쫓아와서 울며불며 말립디다. 돈은 얼마든지 댈테니 부산으로 가자는 거예요. 끝내 안 들으니까 손을 깨물어 태극기에다 「살아서 돌아오십시오」라고 혈서를 써줍디다. 황형은 그 태극기를 이마에 질끈 동여매고 기차에 탔지요. 황형은 이 혈서 덕분인지 그후 그 치열한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어요. 29일 새벽에 안동에 도착하여 2, 3일 후에 김석원 사단장을 만났는데 나보고 몇 살이냐고 물어요. 19세라고 거짓말을 했더니 너무 어려서 안되니 되돌아가라고 해요.
여기서도 또 애원하다시피 해서 그대로 머무르게 됐지요. 이러자 수도사단이 안동에서 후퇴를 하게됐는데 하루는 호림부대·백골부대, 그리고 우리 학도의용병 등 4백여명을 집합시키더니 김석원 사단장이 훈시를 하시더군요. 「조국을 위해 이제 죽을 때가 왔으니 장하게 죽어다오. 적 탱크가 나왔으니 귀관들이 나가 파괴해다오」라는 요지의 연설이예요.
연설이 끝난 다음 결사대를 모집했는데 학도병들은 모두 손들고 지원했어요. 우리들은 수류탄 4개씩을 받아 쥐고 「탱크」가 나오는 길목에 배치를 받았어요. 얼마 있으니 2대의 「탱크」가 나타났는데 우리가 수류탄을 던지기 전에 대전차포에 맞아 녹아 버렸어요. 8월 초에 다시 길안으로 후퇴했는데 이 무렵에 사단장이 갈려 백인엽 대령이 왔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김석원 장군을 믿고 따라 왔는데 이렇게 되니 일이 난처하게 됐어요.
백인엽 사단장은 우리를 보고 적도 평양까지 같이 갈 사람은 손들라고 했지만 한 명도 응하지 않았어요. 백 사단장은 대학생은 상사, 중학생은 하사계급을 줄테니 같이 가자고 달랬지만 우리는 안 들었어요. 이렇게 되니 백사단장은 몹시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날 수밖에요. 군복·군화·총기 등을 모두 압수해버립디다.
대장 김용섭씨가 맨손이 된 대원들을 이끌고 김석원 장군이 새로 부임한 포항까지의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몹시 고된 행군 끝에 8월8일 새벽에 포항에 도착하여 포항여중에 있는 사단 CP를 찾아갔죠. 거기서 M-1소총을 지급 받고 행군으로 지쳤지만 자체로 집총 훈련을 하고 저녁에는 총기수입을 한 다음 12시 넘어서야 교실낭하에서 취침을 했습니다.
8월11일 새벽 4시반쯤에 갑자기 콩볶듯하는 총 소리에 모두 잠이 깼어요. 김용섭 중대장은 각 소대별로 배치를 하고 정문 콩밭에 있는 적이 접근하거든 사격하라고 명령합디다.
적은 수 없이 달려드는데 우리는 4백발씩 가졌던 탄알을 벌써 다 쐈어요. 이때 우리는 아마 실히 30여명의 적병을 사살했을 거예요. 나는 몇 명의 대원과 함께 여중 뒤에 있는 무기고로 달려가 문을 부수고 실탄을 꺼내 운동장에 있는 「지프」에 실었죠.

<사단사령부 말없이 후퇴>
안영걸이가 운전을 하고 유명욱 소대장이 앞에 타고 막 떠나려는데 바로 앞에 적 박격포탄이 떨어져 유 소대장이 팔에 부상을 입었어요. 실탄을 「지프」에서 도로 내려 어깨에 메고 기어가 보급을 했죠. 여중에 함께 있던 사단사령부는 우리에게 아무 연락도 없이 이미 후퇴해 버리고 몇 명의 군악대원만이 우리와 함께 싸웠습니다. 얼마 있으니까 적병 하나가 둑에 올라와 백기를 흔들기에 그대로 사살해 버렸지요. 그러니까 확성기로 「우리는 인민군 5사단2연대인데 국방군 동무들을 해방시켜주겠다. 30분 여유를 줄테니 잘 생각해 보라」고 합디다. 그리고는 사격을 딱 멈추어요.
우리는 「동무들이나 항복해라. 그래 포항에는 어떻게 들어왔나?」하고 큰 소리로 외쳤지요. 「어제 밤에 국방군 암호를 대고 안강을 거쳐 들어왔다. 암호는 달과 별이더라」고 대답해요. 그러고는 「한 명만 나와 보라. 환영의 모범을 보여 주겠다」고 해요. 이때 길안영 대원이 총을 놓고 걸어나갔죠. 웬걸, 몇 발짝도 안 갔는데 그냥 쏘아 버립디다. 이것을 신호로 다시 그들의 총공격이 시작됐어요. 조금 있으니 그들의 장갑차 2대도 응응거리며 들어와 뒤에서도 공격을 해 오고요. 낮 1시반쯤 되니까 사태는 절망적이 돼 버렸어요. 탄약이나 수류탄도 거의 바닥이 나서 이제는 최후의 결전만이 남게 된 거지요. 이때 나는 우리 무전기가 있는 여중뒷산으로 연락해 보겠다고 뛰어갔어요.
거기도 벌써 적병이 점령하고 있어 기겁을 해서 되돌아왔죠. 이때 나도 모르게 「엄마! 엄마!」를 연발했어요. 운동장 앞으로 뛰어오다 그만 적탄에 맞아 부상을 했습니다. 겨우 기다시피해서 원위치에 와보니 대원들은 거의 전멸했고 부상자의 신음과 악쓰는 소리만 들려요.』
※알림=윤남하 목사가 15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고심 끝에 집계 수록한 2천5백명의 전몰학도명단(전사시일·장소 등)이 본사에 비치돼 있으니 관람하시거나 문의사항이 있는 분은 서슴지 말고 문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연락처=중앙일보사 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 전화(28)8211(교환)의 74번. 야간은 (93)2250(서신 문의에도 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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