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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북한의 아웅산 테러 … 그 아비규환 어찌 잊겠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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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이기백 전 합참의장은 “군에선 (보복 계획)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이 전면전 확대를 우려해 실행을 중단시켰다”고 말했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28분(현지시간) 미얀마(당시 버마)의 아웅산 국립묘소. 비동맹권과의 교류 확대를 위해 서남아 순방길에 나선 전두환 당시 대통령 등 우리 정부 대표단이 묘소 참배를 준비하던 중 귀를 찢는 폭발음이 터졌다. 전 대통령의 공식·비공식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건물 잔해 속 희생자들의 처참한 사진은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아픈 장면이 됐다. 9일로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째다.

 이 사건이 북한 공작원의 전두환 대통령 암살 시도로 밝혀진 뒤 우리 군은 북한에 대한 보복 계획(벌초계획)을 세웠지만 확전을 우려한 전 대통령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당시 합참의장으로 장관급 수행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이기백(82·전 국방장관)씨는 8일 “중상을 입고 두 달여 입원하느라 작전계획 수립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실제 군에선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며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이 전면전 확대시 6·25 때처럼 국토가 전장(戰場)으로 변해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실행을 중단시켰다”고 밝혔다. 육군 특전사와 해병대 수색대 등 특수부대원들은 평양의 남산 TV송신소 폭파 등 계획을 작성해 훈련했고, 돌아오지 못하고 사망할 것에 대비해 손발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해당 부대에 보관하기도 했다고 이 전 의장은 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11기)인 이 전 의장은 30년 전의 상황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전 합참의장이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 사건 당시 입었던 정복. 곳곳에 파편에 맞은 흔적과 부러진 명찰이 보인다. 이 전 합참의장은 이 옷을 후배들의 교육을 위해 1985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에 기증했다.

 “생명이 오간 그 아비규환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요. 아웅산 묘소 참배는 원래 8일 미얀마 도착 직후 숙소 이동 길에 방문하기로 돼있었어요. 9일엔 버마 정부 권유에 따라 사원 두 곳을 방문할 계획이었는데, 사원에는 양말까지 벗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예요. 대통령 영부인 이순자 여사가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씩이나 번거롭게 양말벗는 건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해 8일 가려던 아웅산 묘소를 9일 갔습니다. 하루에 두 번 사원을 가지 않고 한 번만 가려고 아웅산 묘소 일정을 사원 방문과 붙인 겁니다. 참배 예정 시간은 10시30분이었습니다.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 시내 호텔에 묶었던 수행원들은 미리 와 대통령을 기다렸어요. 그런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어요. 대통령이 출발시간 10시20분에 맞춰 영빈관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안내하기로 했던 버마 외교 장관이 도착하지 않은 겁니다. 대통령이 화가 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고 해요. 장관이 도착했다는 얘기를 듣고도 3~4분 정도 더 기다리게 했죠.”

 그 사이 대통령과 함께 있던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가 영빈관을 나와 묘소로 왔고, 미얀마 의장대가 연습삼아 진혼곡을 울렸다. 북한 공작원들은 이 대사를 대통령으로 착각해 폭발물 버튼을 눌렀다고 한다. 북한 공작원들이 이틀 전 폭발물 세 개를 설치했지만 하나만 폭발하는 바람에 이 전 의장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폭발물 파편을 30여 군데나 맞았다. 쓰러지는 기둥에 깔려 정강이뼈도 으스러졌다. “이 사실을 접한 존 W 베시 미 합참의장이 의료 전용기를 보냈어요.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집중치료를 받은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은 귀국 후 경제인들의 후원을 받아 그해 12월 1일 자신의 호를 딴 일해재단을 만들었다. 북한에 대한 연구와 희생자 유자녀들의 교육이 명분이었다. 하지만 일해재단은 5공비리의 본산으로 지목되면서 현재는 세종연구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 국제관계 일을 하는 이들이 특히 많다. 고(故) 함병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장남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 김재익 전 경제수석의 둘째아들 김한회 미국 변호사, 이범석 외무장관의 딸 이진영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장 등이다. 김한회 변호사는 국군 포로 문제로 북한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는 업무에 관여하고 있다. 이진영 원장의 남편 조태용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외교 1선에서 북핵외교를 담당하고 있다.

 이 전 의장은 “북한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특수부대원들을 침투(1·21 청와대 습격 사건)시켰으며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캐나다에서 국제테러조직과 접촉하고, 필리핀 골프장 기습을 시도하면서 우리 지도자들을 위협해 왔다”며 “후대들이 북한의 이런 모습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글·사진=정용수·정원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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