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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낙동강 공방전>(13)「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구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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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마산의 위기(3)
「유엔」군 최초의 공세인 「킨」 반격작전은 진동리에서 강적파 층돌, 2일간 뜻하지 않은 고전을 치렀으나 「윌튼·H·워커」장군은 계속 강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9일 하오 좌익을 담당한 해병여단 3개 대대는 고성으로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처음에 적 저항은 미미해서 진격은 순조로 왔다. 그러나 배둔리 동족의 조그만 개울의 다리가 약해「탱크」가 건널 수 없기 때문에 진노를 곡안이-배둔이로 변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0일에 해병대는 배둔리 남쪽에서 저항하는 적을 격파하면서 진격을 계속했다. 폭서로 일사병 환자가 속출했으나 해병대는 그 전통에 따라 진격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미군으로서는 한국전쟁에서 처음 보는 빠른 진격이어서「맥아더」사령부 보도과에서는『적은 퇴각 중…』 혹은 『적은 궤주하고 있는 듯』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나중에 해병대가 사천에서 적 함정에 빠져 겪게될 고전을 생각할 때「맥」사령부 보도과의 그와 같은 발표는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한편 중앙을 맡은 제5연대는 앞서의 진동리 고전 후에도 여전히 완강한 적 저항을 받고 있었다. 우군함 재기 편대가 봉암리 북쪽과 적 보급기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둔덕부근을 맹폭 했지만 도대체 이 방면에 적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기껏 2개 중대정도 일거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적6사단 주력이 있을지도 모른 다고까지 판단하기도 했다.

<염산고개서 적대 부연 만나>
「고드윈·오드웨이」연대장은 상당히 유력한 적군이 있다고 생각했으나「킨」소장은 앞서의 진동리 부근 전투결과나 우익의 35연대가 무촌리에 진출한 이 마당에 제5연대 전면에 적대부대가 있을리 없다고 판단했다.
여하든 제5연대는 적 저항을 배제하면서 10일 정오쯤 봉암리에 진출하여 제3 대대로 하여금 무촌리에 진격토록 했다.
제3대대는 저항 없이 무촌리 전면의 발산고개를 통과했다. 이어 연대주력도 뒤따라 진격하려고 하는데 봉암리 북쪽에 강력한 적부대가 출현하여 발산고개를 봉쇄하고 말았다. 우익에 위협을 느낀 5연대장「오드웨이」대령은 전진을 중지하고 봉암리 일천정 이 부근 계곡에 부대를 집결하고 이튿날 공격을 준비했다.
이날 밤 북괴군은 노숙중인 5연대를 포위하고 맹렬한 야습을 가해왔다. 특히 봉암리 부락과 포병진지에 대한 야습은 치열하여 제1대 대장과 555야 포병대대장이 부상을 입었다. 적은 동이 틀 때까지 습격을 계속하다가 미 군기가 출격하자 산중으로 퇴각했다.
제5연대는 11일 상오 중에는 간밤의 적 야습에서 입은 혼란을 정비하고 하오부터 진격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적은 사방에서 연대에 사격을 가하고 발산고개 북방에는 그들 대부대가 있는 것으로 짐작 됐다. 이래서 연대장「오드웨이」대령은 주간전진은 불가능이라 판단하고 저녁에 제1대대로 고개를 탈취 한 다음 일몰 후 연대 주력은 고개를 통과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킨」소장은 연대장을 무전으로 불러 빨리 진격하라고 독촉했다. 「오드웨이」 연대장은 자기가 목격한 상황을 아무리 상세히 보고해도 「킨」소장은 봉암리 주변에 적대부대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대강의 끈기 있는 상황설명으로「킨」소장도 할 수 없이 연대 이동계획을 승인하고 제24연대의 1개 대대를 증원하기로 했다. 연대는 해지기전에 전 화력의 지원아래 제1대대로 발산고개 북쪽고지를 탈환했다. 그리고는 제2대대를 앞장세우고 연대본부·포병·제1대대의 순서로 서진 할 계획으로 하오9시께 태세를 경비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킨」소장으로부터『제2대대와 포병l개 중대만 전진시키고 나머지 주력은 현재지점에서 아침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이 왔다.
연대장은「킨」소장 명령대로 따르면 봉암리에 남아있는 부대는 포위되어 큰 피해를 볼 것이 뻔하기 때문에 연대 전 병력을 서진 시켜야 한다고 구출하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무전이 통하지 않았다. 「오드웨이」대령의 고민은 컸으나 결국 「킨」소장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J·L·슈로크모른」중령의 제2대대는 발산고개에 잠복중인 적군을 밤새껏 소탕하면서 서진 해 갔다. 뒤에는 발산고개 남북능선에 있는 제1대대와 평지에 포진한 연대본부 그리고 제555·제90·제159의 포병대대 등이 남게 되었다.

<연대장 독단으로 탈출작전>
8월12일 새벽1시쯤 발산고개에서 맹렬한 총 포성이 들리며 신호탄이 올라가자 봉암리 북쪽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1대대 C중대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제1대대장은『날이 새기 전에 전 부대를 계곡에서 빼내야 한다』고 연대장에게 말했으나 「오드웨이」대령은 앞서의「킨」소장명령에 얽매여 결심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1백80명이었던 C중대가 적의 강습으로 분산되어 불과 23명이 후퇴하고 사방에 적병이 우글거리는 것을 확인한 대대장은 다시 전진탈출을 주장했다.「킨」소장이 약속한 제24연대 제3대대의 증원부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중원대대는 아직도 서북방 남쪽 고지에서 적과 교전 중이었다. 그래서 봉암이에는 보병 제 1대대는 고지 위에 포진하고 골짜기에는 자위 역이 약한 포병부대가 산재하는 결과가 됐다.
이대로 날이 새면 포병대가 큰 변을 당하리라고 생각했지만 「킨」소장명령은 현재 위치에 정지해 있으라는 것이었다. 심각한 고민에 빠진「오드웨이」대령은 12일 새벽4시에 연대장 독단 전행으로 전부대의 전진탈출을 명령했다.

<적, 선두거 불 태워 연열 정지>
종대의 발산고개통과는 20분쯤 걸리므로 동이 트기 전에 이 골짜기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차량 종대가 전진을 개시하자마자 굼벵이 걸음이 되더니 이내 정지되고 말았다.
위생중대가 본부중대종대에 억지로 끼여들었을 때 구급차가 길옆 도랑에 처박혀 좁은 자동차로를 막아버린 것이다.
드디어 동이 트고 적의 산발적인 사격이 정지한 차량종대에 가해지기 시작했다.
막 참사가 벌어지려고 할 때 다행히도 처박힌 구급차가 빠져 나와 종대는 전진을 재개, 연대강도 발산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참변은 보병대신 뒤따르던 포병부대가 겪게됐다.
보병과 연대본부가 발산고개를 넘은지 얼마 안 있어 포병부대가 도로 상에서 종대를 짜고 있을 때 적은 3면에서 이를 포위, 근접하면서 맹사를 가해왔다.
적6사단 13연대는 우선 선두 차량을 불태워 종대를 정지시키고는 제555·제90포병대대에 대해 사방에서 포화를 퍼부었다. 또한 둔덕 쪽에서 나타난 2대의 「탱큰」와 수문의 대전거포는 제90포병대대의 포열에 대해 포격을 가했다.
둔덕은 적6사단의 보급기지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길목에 「탱큰」2대를 붙인A중대의 1개 소대를 배치 경계시켰으나 소대장은 대대장의 철수명령이 왔다고 말하고 추병 후퇴해버렸다. 이 소대장은 그 후 정신이상으로 후송됐다. 이래서 적「탱크」와 대전차 포대는 손쉽게 봉암리에 근접하여 미 군포 열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이 때 1백55mm의 미군 야포는 적「탱크」를 쏘려고 했으나 거리가 너무 가까와 응사 할 수도 없었다. 미 포병도 용감히 대행했으나 워낙 자위력이 약해 적의 근접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래서 제555·제90포병대대는 궤멸되고 제159포병대대도 큰 해를 입었다. 「슈로크모튼」중령의 제2대대가 포병을 구출하려고 반전, 12일 정오께 다시 발산고개에 되돌아 왔을 때에는 이미 전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또한 미비사단 포병사령관「조지·B·바드」회장도 공병대를 직접 지휘, 포병 구출차 출동했으나 곡안리 서쪽 고지에서 적에 저지되었다.

<구출 대 왔을 땐 전투 끝나>
한편 이 참상을 보고 받은「킨」소장은 증원중인 제24연대 제3대대의 전진을 독촉했지만 진출이 지지부진이어서 사천도로 위에서 작전중인 미 해병 제3대대를 봉암리로 전용했다.
해병대대는 공군의 긴밀한 지원을 받으며 곡안리에서 저지중인 북괴군을 격파하고 12일 저녁에 봉암리 동쪽으로 진출했으나 그 곳 주변에는 아직도 적병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해병 제3대대는 그 이튿날 아침 봉암리 남쪽 고지를 탈취한 후 봉암리로 돌입하려고 했으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제5해병연대장 「레이먼드·L·마레이」중령은「헬리콥터」로 규장에 착륙하려고 했으나 이것도 불가능했다.
그자에 있는 해병대는 적병들이 계곡에 있는 우군포병시체들에게 개미 때처럼 들러붙어 전이 품을 약탈하는 것을 내려다 볼 수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우군시체는 반드시 수용한다는 것을 전통적으로 자랑으로 여겨온 미 해병대도 봉암리에서는 손을 쓸 수 없었다.
「포병의 무덤」, 혹은「피의 계곡」등으로 불리는 봉암리 전투에서 미군포병이 입은 손실은 막심했다. 제555 포병대대는 전사1백, 후상80에 105취포8문과 차량전부를, 그리고 제90포병대대는 전사1백, 부상60, 실종30에 155mm포6문, 차량26대를 각각 잃었다. 북괴군 측은 이 전투에서 155mm포9문, 105mm포12문 「탱크」13대, 차량1백57대를 노획 내지 파괴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보다는 과장된 것이었다.
봉암리의 비극은「킨」반격작전 전망에 어두운 극치를 드리웠으며 결국은 이 작전을 중단케 만든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알림=윤남하 목사는 곧 중앙일보편집국「민족의 궤언」담당자 앞으로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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