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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으슥한 변두리·밤길 조심을…다발생 지역과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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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낮의 종로네거리에서라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도망치려는 것이 악질 운전사들이죠.』 서울 동대문 경찰서교통계장 양덕환 경위의 말이다. 뺑소니 경쟁에 「때」와「곳」이 없다는 얘기다.
도시의 인구팽창과 각종 차량 댓수의 급증은 교통사고 발생 율을 높였고, 이에 따라 악덕운전사에 의한 뺑소니 행위도 부쩍 늘어났다. 올 들어 1월1일부터 13일까지 발생한 뺑소니사고만 하더라도 19건이다. 양 경위는 뺑소니 운전사의 질이 더욱 나빠져 가고 있다고 걱정했다. 목격자가 뻔히 있어도 우선 도망치고 본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29일 밤11시40분쯤 서울 중구 충무로5가19 앞길을 과속으로 달리던 서울 영1-9484호「택시」가 길을 건너던 김명영씨(27·성동구 신당동산36)와 김씨의 약혼녀 이정희양(20)을 치었다.
「택시」운전사는 두 사람을 차에 싣고 남산으로 올라가 야외음악당 옆 공중변소 뒷길에 버리고 달아났다. 이튿날새벽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이 이들을 발견했을 때 왼쪽다리가 부러진 김씨는 숨진 뒤였고 이양만 목숨을 건졌다. 경찰은 사고 「택시」가 푸른색 「코로나」였으며 왼쪽깜박이 등의 유리가 깨졌다는 목격자의 신고와 현장에서 발견한 유리조각을 단서로 수사를 벌여 이틀만에 운전사 정성호군(21)을 구속했다.
이와 같은 악질운전사는 『언제어디서나 사람이 보건 말건 뺑소니 치고 보자』고 할만큼 양심이 타락했고, 보행자는 그만큼 목숨을 지키기 어려운 세상이 된 것이다.
서울시경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에서 가장 많이 뺑소니사고가 일어난 곳은 혜화동「로터리」에서 미아리삼거리에 이르는 도로와 동대문∼신설동네거리사이로서 각각 80여건이 발생했다. 복잡한 시내를 겨우 벗어난 차들이 시간을 벌기 위해 마구 달리는데다가 보행자가 차도를 무단 횡단하는 예가 많아 교통사고가 잦다. 뿐만 아니라 사방으로 뚫린 골목길이 많아 사고를 내고 도망치기가 수월하다.
이밖에도 비교적 변두리에 속하는 종암동∼장위동, 홍은동∼수색, 삼각지∼용산, 삼각지∼한남동, 신촌∼연희동, 아현동∼마포, 신당동∼금호동, 청계천4가∼7가, 서대문네거리∼홍제동, 한양대앞∼천호동, 청량리∼망우리, 영등포동∼양평동 등 변두리의 으슥한 주택가가 뺑소니 다발지역. 이 지역에서 지난해 각각 50건에서 35건의 뺑소니사고가 있었다. 지난해9월10일 밤11시40분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B지구 시민「아파트」길목에서 25살쯤 된 술집접대부 차림의 여자가 얼굴과 무릎 등이 으깨져 죽은 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현장에서 「택시」의「백·미러」일부가 떨어져있고 「아스팔트」위에 찍힌「스키트·마크」를 발견, 과속으로 달리던 「택시」가 여자를 치어 죽이고 도망친 것으로 단정했다. 서울 변두리의 산허리를 깎아 세운 시민「아파트」촌은 밤이면 인적이 드물고 으슥해 악질운전사가 사고를 내고 양심을 버리기 쉬운 곳.
서울의 중심가에서도 변두리 못지 않게 뺑소니 사고가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에 시청 앞에서 중앙청을 지나 사직「터널」에 이르는 길에서 51건, 서울역∼신세계백화점사이 37건, 종로2가∼3가 사이에서 30건이 일어났다.
서울에 못지 않게 교통량이 많은 부산의 경우 뺑소니사고가 잦은 구역은 부산진구 문현동∼수영, 가야동∼구포, 서구충무동「로터리」∼송도사이, 동래교육대학앞∼수영비행장에 이르는 길. 이곳에서 전체사고의 75%가 일어나고 있다.
뺑소니는 목격자가 번호를 구분할 수 없는 저녁6시부터 자정까지 전체의 43%가 발생하는데 그대부분이 통행금지시간이 임박한 밤11시30분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시간에는 총총히 집에 돌아가는 행인들이 차도를 무단횡단 하거나 얼근히 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다가 당한다.
또 정오부터 하오6시까지 35%, 상오6시부터 정오까지 14%로 대낮에 일어난 뺑소니사고가 전체의 반을 차지하고 있음이 드러나 악질운전사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망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업용차량의 「넘버」판 색깔이 노란 바탕인 것도 문제다. 서울시내의 「택시」가운데 노란색 차가 많다. 차체가 노란색인데다가 「넘버」판까지 노란색이고 보니 목격자들이 사고 차의 번호를 외기 어렵다. 더구나 운전사들이 번호 판을 손질하지 않아 숫자의 검은색 「페인트」가 벗겨지거나 흙과 먼지가 더께더께 묻어 얼핏보면 몇번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도로교통법 제30조의 규정에 따르면 모든 차량은 야간에 「테일·라이트」(미등)를 켜게 돼있으나 「데일·라이트」유리판 위에도 먼지가 쌓여 「라이트」가 있으나마나다.
서울 청량리경찰서 교통과 이상윤 경장(35)은 「택시」의 색깔이 너무 무질서하다면서 『소속회사별이나 차고지의 행정구역별로 몇 가지 색깔로 구분하면 뺑소니차의 차적을 알아내는데 도움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모범운전사 「택시」는 노랑색, 개인「택시」는 자색, A운수는 푸른색 등으로, 혹은 차고가 영등포에 있으면 초록색, 성북구는 검은색 등으로 통일시키면 뺑소니차의 행방 찾기가 더욱 쉬워질 것이라는 얘기다.
경찰은 사고 차를 보고도 외면하는 시민의 신고정신을 나무라기에 앞서 스스로 행정의 구멍을 메워야한다. 모든 사람들이 악질운전사들의 횡포에 희생당하지 않으려면 『내 목숨은 내가 지킨다』는 비장한 결의를 하지 않으면 안될 현실 앞에 서있다. <김재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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