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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중국 동포인 척하고 한국인과 대화 꺼리는 런던의 탈북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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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몇 년 전 중국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에서 김포행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압록강 넘어온 동포”라면서 남자 두 명이 접근했다. 이들은 다짜고짜로 김일성 초상화가 들어 있는 북한 지폐를 보여주며 한 장에 ‘남조선 돈’ 1만원 가치가 있으니 기념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알고 보니 그 돈은 북한의 구권화폐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귀국 뒤 이를 알고 씩씩대는데 회사 동료가 “그 사람들이 진짜 탈북자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한마디를 했다. 맞는 말이다. 사실 그들을 중국동포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헛갈림을 최근 서울의 한 찜질방에서 다시 겪었다. 때를 미는 분이 이북 말씨를 쓰기에 “북에서 왔느냐”고 묻자 “연변에서 왔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나중에 그가 동료와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더니 “공화국”이라는 말이 들렸다. 탈북자가 중국동포 행세를 하는 건가 싶었지만 더 이상 캐묻기도 뭐했다.

 그런 일을 한국도 중국도 아닌 유럽에서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지난달 찾았던 영국 런던의 뉴몰든 한인촌에서 이북억양을 쓰는 남녀를 여럿 만났다. 한국 수퍼, 설렁탕·짜장면을 파는 한국 식당, 심지어 한국식 입시학원에서도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대부분 한국에 들어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영국에 입국한 뒤 공항에서 한국여권을 찢어버리고 탈북자라며 망명을 신청한 경우라고 한다. 물론 한국국적을 받은 사실은 숨긴다. 망명신청 자격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영국에 20년 넘게 거주한 한 교민은 “최근 한인촌에서 일하는 북한 출신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 유학생은 얼마 전 집수리를 하러 왔던 배관공이 북한 출신이었을 정도로 이젠 영국에서 이들을 만나는 게 서울 가리봉동만큼이나 자연스럽다고 했다. 문제는 이들 상당수가 한국인과 대화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일부는 중국 조선족이라고 말하고 다닌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만리타향 한인촌과 주변을 맴돌며 한국인도, 북한인도, 중국동포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살고 있었다.

 심지어 탈북자들이 재입북하는 경우도 이젠 낯설지 않다. 1일에도 북한 언론에 재입북 탈북자 2명이 등장했다고 한다. 통일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12명의 탈북자가 북한에 재입북했고 그중 2명이 다시 탈북해 현재 북한에는 10명이 있다고 한다. 가족에 대한 위협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제대로 자리 잡았다면 그런 일이 있었을까 싶다. 그들이 이 땅에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랑스럽게 살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 도대체 제 발로 한국에 들어온 이들조차 제대로 끌어안지 못한다면 앞으로 통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탈북자 정책을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

채인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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