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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전기 꺼진 지 7년 … 청와대에 방치된 백남준 작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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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위한 프레스센터 ‘춘추관’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벽 위쪽에는 작동하지 않는 텔레비전 모니터가 잔뜩 붙어 있다. 유의해 보지 않으면 무심히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루 백오십여 명 드나드는 내외신 기자도 그 폐물이 뭐 하는 물건인지 모른다. 최근 백남준문화재단(이사장 황병기)이 그 흉물의 비밀을 밝혀냈다. 비디오아트의 아버지인 백남준(1932~2006)이 1990년에 제작한 ‘산조(散調)’다.

 23년 전 춘추관 신축 때 직접 작품을 설치한 이정성(백남준의 국내 작품 관리 책임자)씨 증언에 따르면 12인치 컬러모니터 84대로 이뤄진 ‘산조’는 전원이 들어오면 우리 전통음악의 한 형식인 산조가 흐르는 듯 빛이 명멸한다. 한데 이 작품은 전원이 나간 채 7년째 방치되고 있다. 2008년 3월 잠깐 시험 가동한 일이 있지만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계속 작동시킬 것”이란 당시 관계자 약속은 빈말이 되고 말았다. ‘백남준 작품 목록화를 위한 현황 실태조사 사업’을 벌이고 있는 재단이 먹통이 된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산조’를 발견한 것이다.

 사실 확인을 위해 청와대 전기실에서 일하는 한 직원에게 물었더니 기억은 하고 있었다. 관리 차원에서 비공식적으로 몇 차례 켜 봤던 건 알겠는데 2008년 이후로는 공식적으로 한 번도 작동을 안 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 모니터가 8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트랜지스터 형식인데 최근에 제대로 켜질지는 모르겠다는 답이다. 디지털 방식이 일반화된 요즘 트랜지스터 방식 부품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란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다. “정권이 바뀌니까 새로 들어온 사람이 시설물이나 예술작품 등에 관심이 있으면 확인을 하는 거고, 아니면 그대로 넘어가기 일쑤다.”

 조금 더 윗분에게 자문했더니 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하도 옛날 제품이다 보니 유지·보수·관리비용이 만만치 않다. 춘추관에 예술작품이 전시되면 좋을 텐데 아쉽게 생각한다.”

 지난 5월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은 한·미 동맹 60주년 기념 만찬이 열린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내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던 ‘백남준, 글로벌 비저너리’전에 힘입어 문화외교를 펼쳤다. 백남준은 21세기 한국이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대표 문화상품이다. 춘추관에 버려져 있는 백남준의 작품 한 점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무관심은 문화 융성을 선언한 정부 태도로 걸맞지 않는다.

누가 청와대 주인이 되건 백남준의 작품을 제대로 보존할 주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재숙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