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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갑천고 아이들의 축구·공부·꿈 '해트트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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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13년 고등부 전국축구 강원지역리그 우승을 차지한 갑천고 선수들이 1일 학교 교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가운데 양복 차림이 이기근 감독. [사진 횡성 FC]

강원도 횡성군 읍내에서 북동쪽 13㎞ 갑천면. 높고 낮은 산이 사방을 아늑하게 품어주는 마을 매일리 한 가운데에 갑천중·고등학교가 있다. 읍내 나가는 게 큰 일이었던 이 일대 아이들은 학교가 세워진 1966년부터 이곳 운동장에서 꿈을 키웠다.

 2000년 횡성댐 완공 되기 전까진 그랬다. 인근 5개 마을이 수몰되면서 2008년엔 신입생이 단 한 명 입학했다. 폐교 얘기가 나왔다. 이때 지역사회와 학교가 내놓은 해결책이 축구부 창단이다. 프로축구 K리그 득점왕 출신 이기근(48) 감독이 함께했다. 지역 구단인 횡성 FC를 창단해 중·고교 축구부 훈련을 담당하기로 한 거다.

 기대 이상이었다. 첫 해 중·고교 통틀어 37명이 몰리면서 학교는 기사회생했다. 횡성 FC 선수도 100여 명에 이른다. 올해 갑천고 전교생 70명 중 48명이 축구부원. 갑천고는 인근 청소년뿐 아니라 축구계 아웃사이더들이 꿈을 키우는 학교로 탈바꿈했다.

 갑천고를 찾아온 선수 대부분은 엘리트 중심 축구계에서 비주류에 있거나 너무 늦게 축구의 꿈을 품은 아이들이다. 현재 고교 3학년 선수 11명 중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부에서 뛴 선수는 4명에 불과하다. 박종현(18)군은 3년 전 광주광역시의 자립형사립고 진학이 예정된 수재였지만 공을 차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갑천고 입학을 택했다. 이기근 감독이 일부러 혹독한 훈련을 시켜 돌려보내려 했지만 박종현군은 끝까지 갑천고에 남았다.

 외인구단에 가까운 선수 구성이지만 수준은 높다. 2009년부터 고등부 전국축구 강원지역리그에서 중위권을 유지했다. 올해는 갑천고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9승7무로 강원 지역 최초 무패 우승을 달성했다. 강릉중앙고·춘천고 등 축구 명문도 갑천고를 꺾지 못했다.

 이기근 감독은 “아픔을 아는 아이들이라 더 강한 것 같다. 방해하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서 자정까지 훈련한 적도 있다. 성적에 집착하지 않고 창의적으로 가르치려 했는데, 이렇게 잘 해줄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축구로 1등을 해본 적 없는 아이들인데, 앞으로 축구를 통해 더 많은 기쁨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갑천고의 모든 선수가 프로로 갈 수는 없다. 공을 차면서도 책을 놓지 않은 박종현군은 축구 행정가의 꿈을 품고 스포츠 관련 학과 수시에 지원한 상태다. 3학년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는 김미희(32) 교사는 “피곤해서 잠드는 아이도 많지만 학업 성과를 높이도록 깨우고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갑천고는 한국 유소년 축구의 화두인 ‘공부하는 선수’를 기르는 중이다. 축구부의 꾸준한 성과에 힘입어 갑천고는 교사 1개 동을 헐고 새로 지을 계획이다. 폐교 얘기는 쑥 들어갔다.

횡성=김정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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