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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제 칼럼

보편적 복지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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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심상복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

65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정부가 월 20만원씩 준다고 하자. 대기업 회장이든 독거노인이든 나이만 들면 받는다. 이때 진짜 불우 노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처음엔 없던 돈이 생기니 무척 고마워할 것이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뀔 것 같다. “그 기초연금 이건희 회장도, 빌딩 가진 노인도 다 받는대. 그럴 돈이 있으면 우리에게나 더 주지.” 나아가 정부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돈이 썩었군, 썩었어” 하며. 여유 있는 노인들은 어떨까. 공돈이니 싫지는 않겠지만 좀 미안해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정말 좋아졌네. 그런데 재정적자가 엄청나다던데 우리까지 이런 돈 받아도 되나 몰라” 하며.

 이런 식으로 세금을 똑같이 나눠주면 모든 사람이 좋아할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기계식 형평, 그래서 불공평을 해소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보편적 복지에 내재된 허구다. 따라서 복지정책은 꼭 필요한 사람만을 겨냥해야 한다. 정부 곳간에 금은보화가 차고 넘친다면 모를 일이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올 상반기에 걷힌 세금은 지난해 동기에 비해 약 10조원이나 적었다. 올해 나랏빚은 480조원에 이르고 내년에는 처음으로 500조원을 넘어 515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벌이는 복지 확대는 빚잔치 바로 그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기초연금에 관한 자신의 공약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65세 이상 가운데 소득상위 30%는 제외하기로 했다. 그 아래라도 국민연금을 많이 받는 사람은 20만원보다 적게 주기로 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진영 장관은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연계한다는 방침에 반발해 사퇴라는 초강수를 뒀다.

 최측근 장관의 사퇴 항명과 공약 수정으로 대통령은 큰 상처를 입었다.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동안 여러 차례 강행의사를 밝혀 왔다. 신뢰를 가장 중시하는 그였지만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야당은 못 지킬 공약으로 노인들 표만 챙기고 정치적으로 ‘먹튀’를 한 것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이 사안에 관한 민주당 대선공약을 보자. ‘65세 이상 국민 80%에 월 18만원씩’ 준다는 것이었다. 상위 20% 부자에게는 지원이 필요 없다고 봤다. 박근혜정부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민주당 공약과 비슷해졌다. 이것이 민주당이 화난 진짜 이유가 아닐까. 정부가 모든 노인에게 20만원씩 주고 재정이 급속히 악화돼 궁지에 몰려야 민주당 공약이 돋보이게 된다.

그런데 노선을 수정해 그런 비난을 덜게 됐으니 야당으로선 실망이 아닐 수 없다. 민주당은 청와대를 향해 ‘공약 파기’니 ‘대국민 사기’니 하며 공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더 효과적인 공격 포인트가 있다. 박 대통령이 민주당 공약이 더 현실적이라고 보고, 유사하게 베꼈다고 홍보하는 게 더 먹히지 않을까.

 이번 논란을 계기로 보편적 복지라는 용어가 물밑으로 가라앉는다면 망외(望外)의 소득이 될 것이다. 복지는 국가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심상복 중앙일보 경제연구소장